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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May 18. 2022

'삶으로 연결되는 위안'이 끝났다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준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을 보내며 

다큐멘터리 3일이 종영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꿈을 바꿨더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역사학교수를 꿈꿨는데, 고2 때 나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다큐멘터리 3일>이다. 나도 <다큐멘터리 3일>을 찍고 싶었다.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을 묵묵히 담고 싶었다. 그걸 세상에 내보이고, "자, 지금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전하고 싶었다. 내가 <다큐멘터리 3일>을 볼 때면 그렇게 느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농담, 고민, 표정, 삶의 흔적... 화면 모든 요소요소마다 '삶'이란 것이 잔뜩 묻어 나왔다. 화면은 잔잔했고 내레이션도 조용했지만 그 화면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3일>이야 말로 이 시대의 기록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시대적 사명을 떠나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 일 자체가 너무나 재밌어 보였다.


내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거나, 영상보다는 글이 익숙한 사람이란 걸 중요치 않았다. 어쨌거나 <다큐멘터리 3일>은 내가 봤던 그 어떤 것보다 세상의 진면목을, 사람의 삶을 진득하게 담아내고 있었고,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나 결국 다큐멘터리 PD의 꿈도 여러 사유로 접히게 되었으나, 여전히 <다큐멘터리 3일>이 주는 울림만큼은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다. 



늘 기억나는 다큐멘터리 3일 편이 있다. 하나는 호텔리어 편이다. 웨스틴조선에서 찍은 편으로, 호텔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을 담았다. 객실을 청소하는 사람도, 수많은 세탁물을 세탁하는 사람도, 음식을 만드는 사람도,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도, 사무실 뒤편에서 관리하는 사람도, 음식을 손님에게 전달하는 사람도, 연회장을 만드는 사람도... 내가 알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을 담았고, 그들의 삶을 보여줬고, 그들의 고민을 보여줬던 편이었다. 그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사람 삶 하나하나에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신촌에서의 72시간을 다루며 당시에 자주 호명되던 단어인 "청춘"을 조명한 편이나, 273번 버스를 따라간 편이나, 미혼여성 임대아파트 편들도 편 자체로 기억이 남는다. 임대아파트 편에선 돈을 알뜰하게 모으는 사람, 친해진 이웃과 냄비를 들고 피크닉을 가는 장면, 새로 이사를 와서 짐을 푸는 장면, 밤에 기숙사 정문을 잠글 때 늦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들어오는 사람들... 그 삶의 구석구석들이 가득 담겨있더랬다. 비교적 최근에 봤던 목포 해상 케이블카, 안동의 찜닭골목 등도 떠오른다. 그들이 십수년 간 수많은 공간과 사람을 다뤄왔는데, 종영으로 다루지 못할 삶들을 생각하니 아쉽다. 



.


마지막 7초 동안 시청자는 생각할 시간을 가집니다. 그 순간 PD가 되기도 하고, 화면 속의 사람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죠. 몰입하는 경험을 한 뒤에 시청자는 깨달아요. ‘결국 내 이야기구나.’ ‘내가 사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공감하고, 위로받죠.


-<다큐멘터리 3일 : 삶을 롱테이크로 관찰하라, 그곳에 울림이 있다> 'LongBlack' 콘텐츠의 일부


https://www.longblack.co/note/290?ticket=NT4c01b38961037d2076d8a0e185947cd504f66284


위 문장을 보며 한결 안심하고, 또 아쉬웠다.


 
결국 내 이야기구나. 내가, 우리가 사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우리는 모두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머나먼 곳에 있지만 우리는 함께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구나



라는 나의 위안이 계획된 것이어서 안심했고, 그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쉽다. 세상에는, 여전히, 방송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다른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지언정, 우리 모두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큐멘터리 3일>의 종영을 앞두고 여러 콘텐츠들이 올라왔다.


1) KBS의 디지털 채널 크랩에서 만든 "다큐멘터리3일 명장면" 유튜브 : VJ가 눈물을 멈추지 못한 고물상 편과 화제가 됐던 '시인 어부'가 담겨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xh_hDQgSSI&t=185s


"왜 또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십니까.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난 있잖아요.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낙화'와 '사모'를 낭송하는 장면, 하루종일 설탕물밖에 먹은 게 없다는 할머니와 헤어지는 순간 '가장 좋은 거'를 주겠다며 요구르트를 내미는 할머니를 담은 영상이 또 있었을까.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준 프로그램, 사람의 삶으로 다른 삶에게 위안을 주던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을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다큐멘터리 3일>을 보며 사람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던 사람은, 다큐멘터리pd라는 직업의 꿈은 버렸지만 사람의 삶을 기록하고, 서로의 삶으로 위안받게 하고 싶다는 꿈은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또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고, 꿈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찾아와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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