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 나의 첫번째 아르바이트
나는 2014년 12월 말에 전역했다. 다음 해 1학기 복학하기 전, 내게는 약 2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가 계획했던 건 아르바이트였다. 풀타임으로 일해서 복학 전 돈을 모아두고 싶었다. 사실 전역을 하면서 옷이니 가방이니 하는 대부분의 물건들도 새로 사야 하는 처지였다. 그 때 쓸 돈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20살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건 풀타임이 아니었다. 주말에만 7시간 일하거나 하는 식이었고 가끔 상황에 따라 다른 타임의 땜빵을 쳐주는 식이었다. 평일 9-6의 풀타임 알바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곳저곳 일자리를 구했다.
다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보냈던 곳은 카페나 사무보조 알바였지만 이래저래 좋은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카페에서는 대부분 새로 가르칠 필요 없는 알바생을 원했고, 초짜인 내게 에스프레소를 내리라고 할 만큼 사정이 급박한 곳은 없는 듯 했다. 조용한 휴대폰을 바라보며 조금 지원 풀을 넓혔다. 작은 건물에 있는 인쇄소도 그 중 한 곳이었다.
그곳은 페이를 많이 줬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졸업앨범을 만드는 작업에 일손이 필요해서 뽑는 자리였고, 평일과 주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기준으로 2달 일해서 300이 넘는 돈을 벌 수 있었던 것 같다. 최저시급이 5천원 중반을 하던 때니까 금액이 큰 셈이었지만, 집에 가서 잠만 자는 생활을 해야 가능했다. 그럼에도 거길 지원했던 건 일종의 절박함이었다.
면접을 봤지만 퇴짜를 맞았다. 면접을 본 직원은 '내가 졸업앨범을 잘 들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하는 듯 했다. 육체노동에 적합해보이는 신체는 아니니까. 군대에서 보급행정병으로 일하며 물건을 많이 들긴 했지만, 2년 동안 물건을 들었던 경험보다는 '그냥 더 잘 드는 신체'가 더 탁월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면접에서도 어느정도 소극적이었다. 나 스스로도 '전역하자마자 이렇게 극한으로 일해야 하나?'하는 마음이었다. 결국 그쪽에서도 하기 어렵다는 답장을 받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옛날 살았던 집에서 도보로 30초밖에 되지 않는 레스토랑에서 면접을 보고 있었다. 전역한지 2~3주 정도가 되었을 때일 것이다. 맘에 100% 드는 일을 찾다가는 복학 전까지 일자리 자체를 못 찾겠다는 불안감이 컸다.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군대에서야 고참에 능력을 인정받은 병사였다지만, 기껏 사회 나와서 알바 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다고 하면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러울 것 같았다. 언제까지 집에서 빈둥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연애를 시작했기에 돈을 벌어야 하기도 했다. 20살 때처럼 돈이 없어 빌빌대고 싶지는 않았다.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었던 그곳에서 그 브레이크 타임에 면접을 봤다. 문과 이어져 있는 룸 공간이었다. 30대 중반이었던 매니저님과 1대1로 면접을 봤다. 열심히 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고, 나는 '마침, 적당한 사람을 찾으셨군요'라는 자세로 일관했다. 얼마나 내가 열심히 할만한 사람인지를 어필했다는 뜻이다. 20분 정도를 대화했을까. 그 자리에서 앞으로 함께하자고 했다. 출근일은 내일부터였고, 근무시간은 10시 30분부터 10시까지였다. 9-6보다 훨씬 풀타임이었지만, 내겐 일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태국음식 레스토랑의 홀서빙 자리가 그렇게 전역 후 내 첫번째 아르바이트 자리가 됐다.
출근할 때는 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익숙한 동네에서 셔츠를 2장인가 샀다. 당시 수중에 남은 돈 6만원 정도를 털어서 산 옷이었다. 당시 군인 월급은 병장에 14만원 정도였고, 나는 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따로 용돈을 받지도 않겠다는 자존심이었기에 나는 빈털터리였다. 거기에 조금 더 남은 돈으로는 집 앞 편의점에서 난생처음 왁스를 샀다. 분홍색 갸스비 제품이었다(그 이후 나는 그 제품 라인은 절대 사지 않는다). 저녁에 혼자 왁스를 발라보며 머리를 손질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리 집 앞이 종점이었던 버스가 레스토랑 앞까지 간다는 점이었다. 조금 돌아가는 루트이긴 했지만, 자면서 갈 수는 있었다. 10시가 되기도 전에 출근했던 나는 10시에 맞춰 출근하는 주방 파트 직원 분들부터 만날 수 있었다. 어리바리하게 가방을 사물함에 넣고, 남은 앞치마를 셔츠 위에 둘러멨다. 난생 처음 만져 본 머리가 어색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내게 처음 맡겨진 일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유리 문을 닦는 일이었다. 11시 반에 오픈하기 전, 1시간 동안 매장은 청소를 하며 그 날 런치 타임 준비를 했다. 문은 양쪽에 있었는데, 건물 실내로 연결된 문은 닦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반대편 외부로 연결된 문은 겨울 찬 바람을 그대로 맞는 구조였다. 차갑게 빤 손걸레를 들고 매장 밖에 나가 문을 닦고 있노라면 손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입구가 약간 숨겨져 있어 바깥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나름의 장점이었다.
매장 안에서 각자의 준비로 바쁜 사람들을 보며, 열심히 유리를 닦던 내가 그 시절의 알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다. 그 때 나는 다짐했더랬다.
이 사회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보겠다
이유는 단순했다. 전역 전 나를 사로잡는 생각 중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사회에서 내가 1인분을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정말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산 속 부대에 처박혔던 나는 그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2년 간 뒤처졌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만큼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만큼 나는 '증명'에 절실했고, 유리 문을 닦으며 스스로 계속 속삭였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최약체야. 그러니 이 악물고 이겨내야해"라고.
그 때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우스운 생각이지만(건방지게 무슨 최약체인가), 그 땐 그랬다. 전역하고 나서 사회에 들어온 '막내', 2년 간의 변화를 전혀 함께하지 못한 뒤처진 사람으로서 가장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악을 품고 증명을 위해 힘썼다.
군대에서도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대충만 하면 돼'라는 곳에서 악착같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매일같이 야근을 했더랬다. 같이 일하는 타 부대의 간부와 병사들에게 인정받고 같은 사무실의 간부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군생활의 목표이자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잘 성취해내기도 했다. 스스로 '이 업무에 있어서 나만큼 잘 아는 병사가 있을까?'라고 자만심에 취할 정도이기도 했고, 실제로 그 부대의 1년에 1명 정도로 들어오는 행정병 역사에서 나 정도면 '한 획'을 긋는게 목표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전역하며 그런 나는 죽음을 맞는 것이었고, 이제 사회에서 새로 태어난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새로 태어나니 그 사회의 최약체라는 논리였다. 가격대가 있는 레스토랑인 만큼 이곳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면 '나도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2달, 따뜻한 매장에서 준비하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직원 막내'로서 입김이 나오는 겨울 아침에 문 밖에서 유리를 닦으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되뇌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