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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Sep 07. 2023

일을 이어나가는 힘은 무엇일까

모든 일은 지치기 마련인데

일을 하며 많이 쓰는 말은 '쳐낸다'란 말이다. 대행일을 한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요청들이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예측할 수 없는 만큼의 양으로 찾아온다는 것이고, 기존 메일들을 밀어내는 새 메일들이 눈에 밟힌다는 일이다. 


개중에는 바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딘가에 넘긴 다음 기다렸다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루가 꼬박 걸리는 일이 있고, 며칠이 걸리는 일이 있고, 며칠이 걸리지만 오늘 해야만 하는 일도 있고, 조금은 편한 일도 있고, 조금은 어렵고 낯선 일도 있다.



그 일들을 다 해결하는 메일을 보내고 나면, '다 쳐냈다'라는 마음에 조금 안도감이 든다. 물론 그간 일을 해왔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말 '모든 일'을 다 완벽히 쳐낸 상태란 건 사실 없었다. 어떤 일들은 며칠을 걸쳐서 존재하고, 나의 손을 잠시 떠나기도 하므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끝냈다라고 하면 정확하겠다.


꼭 대행일이 아니어도, '쳐낸다'란 말은 통용된다. 인턴기자를 하며 기사를 쓸 땐 다가오는 마감마다 기사를 완성해내는 일이 쳐내는 일이었고, 심지어 레스토랑 알바를 할 때에도 런치 / 디너를 '쳐냈다'. 그런데 그 때는 '쳐낸다'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단 생각을 했다. 그 이유를 찾다가, 한 가지 힌트라고 할 만한 것을 떠올렸다.


최근 '일을 하면서 즐겁다, 행복하다란 걸 느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일이건 지치고 녹초가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마찬가지일텐데, 어떤 일은 비교적 보람차게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 때 한 이야기는 '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 나의 일. 내가 이끌어가고 선택하는 일. 그러면 '쳐낸'게 아니라 '끝낸'게 되고 '마무리'한 게 된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나만의 일이 된다. 회사의 돈을 담당하는 나의 일, 작은 공방을 지켜나가는 나의 일, 반짝이는 장식품을 만드는 나의 일, 음식을 만들어 파는 나의 일.



그게 아니라면 또 하나의 조건이 떠올랐다. '내가 한 일의 결과물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 손님이 빠져나간 가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작업물 같은 것들이 그렇다. 과거, 행사를 치를 일이 참 많았다. 행사라는 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피로한 일이지만 끝날 때면 그 에너지가 사람을 일으켜세움을 느낀다. 에너지 가득한 공간이 주는 힘, 그 모든 사람이 빠져나간 공간을 정리하는 일,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 지치지만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경험들. 준비할 때면 '지긋지긋'하지만 치르고 나면 또 '이 맛에 하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할 때도 그랬다. 예고 없이 닥치는 손님들을 상대로 실수없이 모든 음식을 잘 내보내고 나면, 그 번잡했던 피크 타임이 지나고 수많은 그릇들이 다시 되돌아오면 까닭모를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했던 일의 성과를 바로 그 자리에서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과거 군대에서 보급 행정병을 할 때도 비슷했다. 사무실에서 엑셀로 전 연대의 물품들을 어떻게 배분할지 계획을 작성하고 창고에 가서 그 물건들을 마주한 다음, 차에 싣고 전 부대를 돌고 뿌리고 나면 정말로 '상쾌'했다. 내가 있어 2천 명의 병사가 제 때 물건을 받을 수 있고, 나는 그걸 내 눈으로 마주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꽤나 무거웠던 그 일을 나름 기쁘게 해냈더랬다.



그렇다고 그 일들이 다 즐거운 일이고 모두에게 유의미하냐고 하면 물론 그건 아니겠다. 사람마다 느끼는 포인트가 다를 수도 있고, 아무리 유의미하더라도 그걸 짓누를 만큼의 무게가 있다면 사람은 쓰러지기 마련이니까. 다만 '일의 주도권'과 '눈으로 마주함'이 비교적 일에 있어서 쉽게 성취감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성취감은, 사람을 조금 더 그 일에 묶어놓는 역할을 한다. 똑같이 일은 힘든데, 퇴근하는 그 시점 성취감 조차 없다면 남는 건 '오늘도 쳐냈다'는 감정 뿐이니까. 물밀듯이 닥쳐오는 손님들, 행사 참여자들, 메일들을 해결하고 나서 성취감을 마주하려면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가 없이 그저 반복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면, 그 모든 과정은 '쳐내는' 것에 그치고 만다. 의미가 없는 그저 일이기에 '내 것'이 아니라 '쳐서 다시 돌려내는 것'. 


대행하는 일만이 가지는 즐거움도 분명 있고, 다른 대행 일은 비교적 쉽게 또 성취감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일은 다른 대행일에 비해 장점이 있는 만큼 그 성취감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긴 비교적 어렵다. 그렇다보니 스스로 '오, 이번 광고 캠페인 리포트폼은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기깔나게 만들었는걸'이라고 생각하거나, 업무에 관계된 사람들로부터 '덕분에, 감사하다'란 이야기를 듣거나, 같은 팀원들에게서 '고생한다'란 말을 듣는 곳에서 나온다. 



<다큐멘터리3일>이나 <동네한바퀴> 같은 프로그램을 정말 많이 봤다. 늘 드는 궁금증은 '대체 어떤 힘이 저들을 저 자리에 오랜 기간 묶어놓을 수 있었을까'였다. 수십 년 한가지 일을 해왔던 사람들,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켜낸 사람들. 그들은 늘 손을 내저으며 '다 먹고 살아야 하니깐 했던 것'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먹고 살려고 했던 사람과 그 일이 자신의 무언가가 된 사람은 다르다. 나는 그들을 보며 나에게서도 그 원동력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난 'AI 시대가 열려서 우리가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자기계발에 집중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최근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일이 없어진 시대에, 우리가 행복이나 기쁨, 원동력을 찾기란 너무 어려워지지는 않을까'. 우리 모두 일을 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일은 어떻게 보면 비교적 쉽게, 어떤 자리에 놓이는 것만으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게 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또 어떤 지점에서 힘을 내고, 기운을 얻고 다시 일에 '달려들게' 되는가. 지칠 수 밖에 없는 하루의 끝, 돌아가는 길에 '그래도, 썩 괜찮았다'라고 할 수 있는 바탕은 무엇인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게 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에 대해 생각했다. 성취감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일, 혹은 그 누군가의 일이 더 나아서 혹은 더 힘들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일을 해야 하는 우리가, 우리의 일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기쁘게 일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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