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이병과 보상심리가 만든 책임감

by 다이안 Dyan

직장생활 중 첫 지각.

유연한 근무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지각의 개념이 모호할 수는 있으나, 내가 한 것은 명백한 지각이다.

그 지각의 사유도 늦잠. 내가 눈을 뜬 시각은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이었고, 일어나자마자 낮게 욕을 뱉어내야 했다.

7시 35분. 서울역에 도착해 카드를 찍고 출구를 나간 뒤 화장실에 잠시 들렸을 시간. 이 날은 그 시간에 나는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막 이불을 걷어찬 상태였다. 운전중일 팀장님에게 급히 전화를 해본다. 연결이 되지 않으니 몇 걸을 안 되는 화장실을 향하며 다시 또 급히 메시지를 남긴다.

[팀장님 죄송해요. 알람을 못 듣고 지금 일어나 버렸어요. 먼저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따로 교통편으로 이동할까요 어떡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어떡할까요'는 너무 무책임해 보이지 않나?

아직 잠이 덜 깬 것이 분명하다.

[모든 대화 상대에게서 삭제]

[모든 대화 상대에게서 삭제]

[팀장님 제가 알람을 못 듣고 자버렸어요 죄송합니다. 다른 교통편으로 가겠습니다]

삭제된 메시지 위로 그나마 책임감 있어 보이는 메시지를 남긴다. 막 일어나서 전원이 켜지지도 않은 머리로 조금이나마 어른스러워 보일 수 있는 메시지를 쥐어 짜냈다.


그야말로 Emergency. 응급상황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참여 인원 중 이미 한 명이 코로나 확진을 받아 빠지는 상황이었다. 코로나 확진인 리더급은 따지자면 나와는 다른 팀이지만, 여차하면 그쪽 팀에 지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백업인력 없이 움직여야 하는 내부 상황에 늦잠으로 인한 지각이라니. 게다가 하필 지각한 오늘의 출장 목적지는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2주 가까이 반복된 출장이었지만, 여전히 나의 몸은 이 일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들다니... 급하게 다시 손가락을 놀려 목적지 주변의 대학으로도 검색해 보고, 내가 쓸 수 있는 경로를 쉼 없이 탐색한다. 일어난 지 5분 된 머리로는 감당하기 힘든 작업이다.


[혹시 서울역까지 지금 오면 너무 늦을까요?]

[저 때문에 다른 분들이랑 1시간은 기다리셔야 돼서... 그건 아닌 것 같아서ㅜㅗ]

[일단 다른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고 다시 연락 줄게요]

돌아온 팀장님의 답장에 그동안 업무용 메신저에는 낸 적도 없는 오타도 내며 급히 답장을 한다. 어쩌면 서울역에서 기다리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 준비를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신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부터 묵직한 몸을 억지로 부지런히 움직인다. 빠르게 얼굴을 적시며 눈곱을 떼고, 한시가 급하니 최대한 여러 동작을 한 번에 하려고 애쓴다. 부랴부랴 어제 대충 생각해 둔 옷을 입고, 미리 싸둬서 다행 가방을 짊어지고 어찌 될지 모르는 이동 경로와 방법을 제쳐두고선 집을 나선다.


역을 향하는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는 중 울린 전화.

"이사님이 이미 나왔으면 오늘은 사무실로 출근해서 근무하라고 하시네요. 요청사항이나 내용 공유할 것이 생기면 제가 전달드릴게요"

"네, 죄송합니다...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사실 짧고 굵게 끝난 통화 뒤에 삼킨 말이 더 많다.

'제가 지각한 이유는 몸이 안 좋아서 푹 자버린 탓입니다.' '컨디션이 안 좋기도 하고 지금 막 집 밖에 나온 건데 재택으로 근무해도 될까요?'



몸이 아픈 것보다 내가 지각해서 내 몫을 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다. 그래서 차마 내가 아프단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나는 왜 내가 아픈 것은 숨기면서까지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몸이 아파서 출장을 가지 못 할 것 같다고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책임감이 강한 것은 장점이고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직장생활 중 깨달은 여러 가지 교훈 중 하나가, 뭐든 과유불급이라는 것이다. 특히 '과한 책임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런 작은 것에도 과한 책임감을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유를 찾으려 애써본다. 원인을 알아야 쓸데없이 과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유 1. 맏이는 밖에서도 맏이 노릇을 한다

직장에서 내가 이토록 과한 책임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이 '맏이'로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자기기에 설정된 기본값처럼, 집안의 맏이이자 양가의 손주들 중에서도 맏이 그룹에 속하며 키워온 책임감이 결국 나에게는 기본값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맏이라서 동생들을 살펴야 하고, 모범이 돼야 하며 부모가 뭐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알아서 잘하는 그런 맏이의 자세 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한 자세와 마음가짐은 사회에서의 조직생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대학교 때 수없이 거친 팀프로젝트에서도 이런 내 기본값은 언제나 "on"이었다. 한 번도 설정이 변하지 않은 채 늘 그대로 켜져 있던 덕분에 가장 기피하는 발표 또는 발표자료 만드는 역할은 늘 내가 차지하곤 했다. 집안일은 싫고 실컷 뛰놀고 장난치고 싶던 어린 시절, 동생들이 하기 싫다고 도망갈 때, 동생이 같이 도망가자고 손 붙잡고 끌고 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안 하면 엄마가 혼자 다 해야 되니까라는 생각에 나는 또 마음 불편해서 조용히 혼자 돌아와서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집에서 동생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결국 맏이는 꾸역꾸역 해내듯이, 대학교에 와서도 또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의 맏이병은 고치고 사회로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누구에게 업무를 더 줄까 고민하는 영악한 상사들의 눈에 띄는 먹잇감이나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유 2. 내가 ‘민폐’가 되지 않으면,
남도 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내가 뽑을 한 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기준이 있듯이, 내 삶의 기준에서는 ‘민폐’라는 단어는 조연으로도 출연시키고 싶지 않은 그런 단어이다. 그래서 내 몫을, 내 역할을 해내는 것에 부단히 책임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내 몫을 해내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그만큼이 전가되니까. 그것을 민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폐가 나인 것도 싫지만, 내가 당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내가 먼저 피해를 주지 않으면, 나도 덜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당신에게 이만큼의 책임감을 보이며 행동했으니, 당신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반이라도 실천해 달라. 뭐 그런 느낌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암시적인 행동이기에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고 민폐를 끼쳐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의 기준에선 내가 내 몫을 100% 수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 따른 행동이니 타인에게 민폐가 안 됐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 나름대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애가 넘치는 것인지, 자기애가 넘치는 것인지 이 행동양식을 버리지 못한다. 내가 책임감 있게 일하고 행동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그런 보상심리에 기반한 행동양식 말이다. 세상의 진리처럼 떠도는 말 중 하나인 ‘남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때,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을 더 되새김질해야 하나 보다.






매일 올바르게 살고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는 직장인일 뿐입니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기 바쁜 일개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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