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이야기 /1. 다이안

by 다이안 Dyan

모니터 속 엑셀 화면에 눈이 시려질 때쯤이면 인공눈물 몇 방울을 넣더니 눈을 꼭 감는다. 다시 눈이 촉촉해질 때까지 몇 번을 깜빡이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선 생각했다. ‘떠나고 싶다.’ 목적지는 모르겠고, 원하는 풍경과 그림은 있었다. 숙소 근방에 작은 책방에서 책을 구경하다 한 권을 집어 들고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책 한 번, 바다 한 번을 바라보며 느릿한 일상을 보내는 것. 다이안은 인공눈물을 눈에 가둔 채 그 평화롭고 느린 일상을 그리고 또 그렸다. 머릿속으로 그린 그 잔잔한 상상이 언제쯤 현실로 될 수 있을까. 턱을 괴고선 다시 멍하니 노트북과 모니터 속의 서류들을 바라본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 온전한 쉼을 누리고 싶은 욕심은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다이안을 찾아왔다. 집을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가던 중 문득 멍해지는 시간에, 따뜻한 물줄기에 몸을 녹이며 비누 향에 취해있던 시간에 그렇게 떠나고자 하는 욕구는 욕망이 돼서는 생각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똑똑, 떠나고 싶지 않니.

똑똑똑, 다 잊고 사라져 버리자.

똑똑, 평안을 찾아 떠나는 거야.

욕망이 울리는 쉼 없는 노크 소리에 이건 진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이자 계시가 아니겠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든 감정이든 둘 중 하나가 위로 아래로 정점을 찍을 때면 즉흥적인 사람이 되어 항공권에 돈을 꼬라박았다. 20대의 다이안은 심심하면 항공권을 검색했고, 고민은 삼 일을 넘기지 않아 어느새 빈 통장이 되곤 했다. 코로나와 잠시 백수였던 신분이 잠시 그 충동적인 취미를 억눌러놓았나 했더니,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또 스멀스멀 여행 병이 도지기 시작한 것 같다. 30대 직장인 다이안은 20대의 모습이 되어선 핸드폰으로 토독 토독 검색을 시작한다.


그리고 겨울을 앞두고서야 다이안은 제주도에 도착했다. 다이안이 이 한 시간의 비행과 삼 일의 평안을 좇는 휴가를 결정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명 핸드폰으로 항공권을 사냥하는 모양새는 이십 대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5년의 세월 동안 다이안의 머릿속에는 현실주의가, 마음속에는 소심함이 뿌리내렸다. ‘내가 지금, 이 여행을 가도 되는 건가?’라는 물음과 함께 결제 버튼 앞에 선 다이안의 손가락은 주저하기 바빴다. 주저 없이 결제를 누르던 이십 대의 용기가 그리워졌다. 어쨌든 주저하던 손가락이 결제를 누른 덕분에 드디어 상상의 풍경을 만나러 가게 됐다. 그렇게 도착하고 나니 이제 다시 이십 대의 버릇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왕 온 거 걱정하지 말고, 맘껏 즐겨 버리자.’


그렇게 첫날은 머무는 독립서점에서 책을 두런두런 살피다가 두 권을 집어 들며 끝났다. 맘껏 즐기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품 안에 담았는데, 나이만큼 무르익은 경제관념에 내려놓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 아낀 것을 내일의 여유에 보태기로 한다. 이동밖에 하지 않은 첫날이지만, 뚜벅이는 꽤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내서 노곤하다. 벌러덩 숙소 침대에 드러누워선 내일은 어디를 가서 시간을 보낼지 핸드폰과 함께 고민을 나눈다. 감기는 눈과 풀리는 손에 다이안은 더듬더듬 불을 끄며 여행의 첫날을 마무리한다.


여행을 와도 습관은 어쩔 수 없다. 출근 시간에 맞춰진 바이오리듬대로 잠에서 깬 덕분에 조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나왔다. 인물 사진보다는 풍경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다이안은 화려하지 않다. 검은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곰 인형 털 같은 후리스를 입고선 버스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관광객보다는 주민 같은 편안함을 장착하고선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버스를 기다린 시간과 지루함을 앉은 다리를 쭉 뻗었다가 흔들기도 하며 표현해 본다. 그렇게 멍하니 다리를 흔들거리다가 벌떡 일어서서는 동네 풍경을 찰칵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고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평일이라 카페의 창가 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어제 사 둔 책 한 권, 밀크티 한 잔, 그리고 말차 쿠키 하나. 테이블 위에 놓아두니 제법 여유로운 분위기가 나서 찰칵하고 순간을 담아낸다. 글자를 읽다가 어딘지 심심하면 창가로 눈을 돌렸다. 읽고 읽다가 졸음이 찾아오면 걸음을 카페테라스로 옮겨 먼발치서 바다의 저 멀리까지를 눈에 담아냈다.


사실 그동안 머릿속으로 그리던 상상의 풍경은 100% 상상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현실의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그림이었다. 짙고 푸른 동해보다는 약간의 초록이 어린 제주도의 물색을 다이안은 좋아했다. 너무 파랗기만 하면 어딘지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 차가운 인상은 감정의 동굴 속 외로움과 우울을 끄집어낼 것만 같았다. 아니면 이미 내 주변을 에워싼 녀석들에게 날 집어삼키라며 기회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주도의 바다는 파랗기만 하지 않다. 우울처럼 푹푹 빠지는 모래만 있지 않다. 까만 현무암 덩어리들이 늘어진 김녕의 바닷가에서는 검정과 파랑이 주는 차분함이 있다. 에메랄드빛 물결을 자랑하는 함덕의 바다에서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다. 깊은 파랑보다는 초록이 어린 물빛이 좋았기에, 자연스레 다이안의 목적지는 제주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술렁술렁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 제주도의 뚜벅이는 다른 여행자보다 하루가 짧기에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버스 시간을 한 번 보더니 다이안은 빠른 걸음으로 바닷가를 향한다. 가기 전 마지막으로 바다와 인사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멀리서 볼 때는 느낄 수 없던 맑음과 까만 현무암에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열심히 담는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버스에 올라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슉슉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감상하던 다이안의 눈은 감긴 지 오래다. 잔잔한 바닷가의 풍경을 원 없이 보고 나더니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나 보다. 하굣길의 소란스러운 버스 안에서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뜬 다이안은 허탈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제주도 버스 안에서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건만,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자취방의 천장이다. 얼굴 옆에는 뒤집힌 채 모로 놓인 핸드폰이 반기고 있었다. 저 커다란 핸드폰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깨지도 않았다니. 여행지를 검색하다 잠에 들어버린 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정말 쉼이 필요한 것 같다. 손가락에 용기를 실어줘야겠다.





여행 후기가 아니라 여행 가고싶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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