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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an 09. 2024

밑줄긋기는 끝난 것이다

잠언에 줄을 긋지 말고, 풍경에 줄을 치라

일이나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책상이나 책꽂이에 쌓여 있는 책들 중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서서 10분 내지 20분 정도 읽고 나서 일이나 공부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모드전환에 예열이 필요한 것이다. 식사 후나 휴식 후에 곧바로 일이나 공부에 몰입하기는 어렵다. 식사/휴식과 일/공부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적당한 정신적 긴장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습관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은 계시-집어들고, 읽어라(Tolle, Lege)-와 같은 효과를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오늘만큼은 좀 달랐다.


오늘 무작위로 집어 든 책은 <장정일의 독서일기5>였다. 후루룩 책을 넘기다가 눈길을 확 잡아 끈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소설 속의 잠언은 그 작품에 대해서도 또 그 작가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잠언에 밑줄을 치지 말고, 풍경을 새겨야겠구나'라고 내게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던 소설은..." 평소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고민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이 글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위 인용문이 들어 있는 글 꼭지(위 책 160쪽-165쪽)를 의자에 앉아 천천히 정독했다. 세 번 정독했다.


소설 독자들이 잠언에 밑줄을 치는 이유 내지 심리를 장정일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석한다.

1) 소설 속에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편향된 질 낮은 문학 교육의 희생자이기 때문(그래서 소설의 내적 구성과 미적 장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2)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일에 긍지를 느끼지 못하고 부끄럽기 때문(그래서 보상심리로 잠언이라도 찾는다는 것)

3) 게으르기 때문(생각하기 싫어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잠언은 본인 대신 생각하고 해답을 내주는 반가운 존재라는 것) 


장정일은 소설은 "깨달음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고, "깨달음을 위한 구성적 기술"이라고 말한다. 즉 단순히 작가가 깨달은 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아니고, 읽는 이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내적 구성과 미적 장치가 내장된 정교한 구성물이라는 것이다.(물론 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 소설을 읽고 꼭 뭘 깨달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잠언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서에서 풍경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독서로 소설 읽기의 방법을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당신은 소설을 읽는 한에는 연필이 필요 없다." 잠언은 외우기 위해 밑줄이 필요하지만, 소설 속 어떤 압도적인 풍경은 외우지 않아도 읽고 나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 밑줄긋기는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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