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 오후, 상담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온 A 씨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차가운 바람에 붉어진 듯한 코끝,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가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그녀의 이야기를 미리 전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그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29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께 어렸을 때 제 마음을 털어놨어요. 하지만 제가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한 바보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목소리가 떨렸고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를 참을 수 없었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얼마나 아픈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그녀의 표정에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이야기를 꺼내놓은 후의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A 씨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다. 어린 시절 형성된 마음의 결은 보이지 않는 실처럼 우리의 현재를 수놓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친밀한 관계를 시작할 때마다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
상대방의 작은 반응에도 과하게 상처받는 자신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강박적 신념
이러한 패턴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은 다르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며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왔다.
어떤 이는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두렵고, 또 다른 이는 작은 갈등에도 크게 흔들린다.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나치게 타인의 기대에 맞추려 애쓴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닌, 그저 살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발달시킨 우리만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었던 그 방식이, 지속적인 불편감을 주기 시작한다면, 우리에겐 변화의 가능성이 다가왔다는 신호인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다르게 써나갈 수 있다. 그 첫걸음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오늘 처음으로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어요. 마음이 많이 아프고 혼란스럽지만, 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A 씨의 이 깨달음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겪는 많은 어려움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깊은 자기 이해로 이끈다. 마치 어둠이 있어야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듯, 때로는 가장 힘든 순간이 우리를 가장 의미 있는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뇌는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뇌가 스스로 신경 회로를 바꾸는 놀라운 가소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다면,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미래를 다시 쓸 수 있게 한다. 그 첫걸음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은 실천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자신이 느낀 감정을 글로 적어보자. 단 한 줄이라도 괜찮다.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의 첫걸음이다.
우리가 겪은 경험은 결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안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그 경험을 딛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마치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메워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킨츠기처럼, 우리의 과거는 우리를 더욱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29년간 담아두었던 마음을 표현한 A 씨처럼, 당신도 오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 여정이 때로는 고단하고 두려울 수 있지만, 그 여정에서 당신은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따뜻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봄이 오기 전 겨울이 가장 춥듯이, 치유의 과정도 때로는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롭게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하루,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네가 지나온 시간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너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너는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너의 방식과 속도로 나아가는 너의 여정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다워."
당신의 새로운 이야기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