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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er May 27. 2020

매 순간 진화합니다

영화<최악의 하루>

주의!

영화<최악의 하루> 줄거리 언급합니다.

뮤지컬<블랙메리포핀스>와 <여신님이 보고계셔> 내용 일부와 사진을 사용했습니다.




영화<최악의 하루>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연기 레슨을 받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어떤 대사를 말하며 연기한다. 레슨 선생님으로부터 부족함을 지적받는 피드백을 듣는다.


연기 레슨 후, 그녀는 세 남자를 마주치게 된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남자, 예상치 못하게 만난 남자, 우연하게 알게 된 남자.


그녀는 하루 종일, 남산 주변에서 걷고 머물면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골머리를 앓는다.


꼬일 대로 꼬인 하루가 끝나가며 밤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오늘 낮에 레슨에서 연기했던 대사를 다시 한 번 읊는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 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삶을 영감으로 활용하는
배우의 모습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국인 여성과 한 일본인 남성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 둘은 각자 정말 최악의 하루를 겪는다.


우연히 만났다가 밤에 남산 길에서 다시 만난 둘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 때, 여자가

레슨 중 지적받았던 대사를 다시 연기하는 독백이 들리는데 

나는 이 장면이 인상깊었다.


그 날 겪은 일들을 통해,

첫대사를 다시 연기하는 여자는

낮과는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최악의 하루로 얻은 영감을

자기의 연기 자산으로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간에

그녀의 경험은

그녀의 연기 자산이 되었다.


한을 품어야만 제대로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서편제>속 '아버지'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내가 본 공연은
과연 완성본일까?


한 언니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같은 배우, 같은 팀이 올리는 한 기간의 공연은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는가.
언니는 응.
프로들은 일정한 퀄리티를 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연습하기 때문에, 공연에도 최선의 노력을 하기 때문에 일정하다던 언니 의견.

나는 아니오.
공연은 라이브 퍼포먼스이니까, 어떤 변수라도 공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매 공연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계속 변할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격해지는 토론이 부담스러워 당시에는 수긍하는 척 했지만, 지금까지 생각이 변치 않았다.


하나의 공연을 '완성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의 경험
:공연 당일 점심에 덧붙인 캐릭터


배우에게는 생활 속에서,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것이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내가 맡은 인물의 말투와 행동을 변화시킨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맡은 역할은 동네아낙1이었는데, 무슨 소문이 나면 쏜살같이 달려와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통과 같은 인물이었다.

시대 배경은 조선시대, 소식에 밝은 여성. 이런 배경을 토대로 내가 그린 아낙1의 직업은 주모였다.

인물의 말투와 행동, 인간관계 등을 구체화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장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대하고, 소식통이면서도 화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점 등 여러 면을 고려했는데, 너무 활발해도 이상했고 너무 조심스러운 행동도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각종 사극 드라마와 영화 영상 클립에서 소식통 역할을 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참고하며 연습했다. 매 시간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연습했지만, 영상으로 짜집어서 만든 인물은 내가 느끼기에 어색했다.

어느덧 공연 당일! 나는 마침내 살아있는 모델을 발견했다.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하던 중 내가 구상하던 캐릭터와 너무 닮은, "아 저 모습이 바로 그 인물의 실사판이다!"싶은 분을 발견했다.

바로 식당 아주머니(이하, 식당 이모♡) 한 분.

식당 이모: 총 몇 명이야?
일행: 00명인데, 아직 0명이 오고 있거든요. 테이블 이쪽 두개 쓸게요.

식당 이모: (밑반찬을 챙겨주시며) 뭐 시킬거야?
나: 이쪽 테이블은 아직 덜왔는데 좀 이따 시켜도 될까요?
식당 이모: 그래 그렇게 해!

쓰면서 눈물이 난다. 그 식당 이모의 시원스러운 말투와 프로같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내 필력으로는 담아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식당에서 주문을 보류하는 대화를 한 순간부터 식당을 나서기까지 나는 그 식당 이모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말투와 행동을 관찰했다.

그리고 리허설과 본 공연에서 최대한 그 생생한 인물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또한, 해당 공연은 딱 1회 공연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공연을 앞두고는 이런 말도 했다.

"잘가, 00(자기 배역 이름). 넌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지겠구나."


공연을 마무리할 때 정든 배역과 작품을 보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 시간,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인물은 영영 사라진다. 다시는 같은 인물로 살 수 없다.

배우가 들숨 타이밍 한 번만 달리 해도 느낌이 달라지고, 내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 조합마다의 케미도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그 순간, 그 시간 그 사람들만의 케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간에 연기하는 인물은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에요."
_<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배우연기 외의 변화
:변화를 목격한 예시 둘


배우의 연기 뿐 아니라 작품의 줄거리 자체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사례1: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좌) 4남매와 메리 / 우) 여자형제 안나를 그리는 헤르만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첫 공연에서 4남매 중에서 장남인 한스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몇 번째 시즌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차남인 헤르만의 관점으로 이야기 진행이 변경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버전인 헤르만 시점이 더 좋았다. 법조계 인물이 된 한스보다는 화가가 된 헤르만이 트라우마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인물의 감정을 따라 줄거리를 따라가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사례2: 뮤지컬<여신님이 보고계셔>

좌) 여신님과 남한군2+북한군4 / 우) 당차고 밝은 여동생과 소심하고 어리버리한 오빠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재연을 관람할 때, 이상하다 싶던 대사가 어느 시즌부턴가 바뀌었다.

한 북한군 병사의 여동생이 "오빠는 기생 오라비라는 말이 좋냐..."라고 투정부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당돌하고 발랄한 캐릭터의 성향과 맞지 않아보였다.

변경 후에는 북한군 병사가 '사람들이 나보고 기생오래비같대...'라는 내용으로 투정 부리고 여동생이 "기생오래비 맞잖아! 내가 기생이고 오빠는 내 오빠니까!"라고, 당차게 어울리는 말을 했다.



결론


하나의 공연을 수 번, 수 십번 관람하는 일명 "회전문 관객"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똑같은 공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공연은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라이브 퍼포먼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가 어떤 특별한 공연을 보게 될지는 끝날 때까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위-아래, 좌-우 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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