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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er Dec 28. 2019

나는 이스마엘

소설일까, 수필일까, 시일까?

2019.12.28. 토.

25분간의 새벽 글.


나는 이스마엘.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왔다. 새벽시장의 항구 같은 곳. 저마다의 팔 거리 혹은 살 거리에 집중하면서, 남보다 잘 팔고 사려고 눈치코치 피 안 터지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에, 드나드는 문에, 각 '상인'들이 '판'을 펼쳐둔 곳마다 굽이굽이 물길을 이루듯 섰다가 움직였다, 섰다가 흐르다, 또 흐른다.


흘러든다.

빠져나가는 흐름보다도 흘러드는 것이 더 많은 모양새로.

저 사람들은, 나는 팔려고 혹은 팔리려고 오는 게 아니라

바다로 가고 싶어서, 바다를 이루고 싶어서 흘러드는 것이었던가?

나 또한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흐르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금 정의하게 된다.


난 이스마엘,

이곳은 바다로 흘러드는 내(stream. 작은 개울)들이 모여드는 곳.

너비나 깊이는 모르겠으나, 각자의 흘러듬을 승인받고 싶은 내들이...

승인을 받는 내들?

피식 웃음이 나온다.

허락을 받고 바다로 흘러든다. 수문이 쌓였던가?

그 수문이 매년, 매 순간 견고해져서 이젠 기계로 각 내의 미세한 성분 분석까지 해내는가,

그리하여 "너는 안된다"하여 흘러드는 내를 돌려보내기까지 하는가.

문 앞에서 되돌려진 그 내는 다시 그 수문으로 돌아와, 마침내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돌고 돌아 이 수문으로 흘러드는 나는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까?

바다가 될 수 있을까?


흐름이 다시 움직인다, 내 전해질은 적정한가?

멈춤, 이 바다는 내가 그리던 바다가 맞던가?

흐름이 또 시작되었다, 내 용존산소는 넉넉한가?

흐름이 잠시간 멈췄다, 내의 이런 고민은 쓸모가 있는가?

난 그 수문이 무얼 좋아하더라, 통과시켜주더라는 소문만을 알 뿐이요,

내가 가진 그것이 그에게 충분한 기준점 인지도 문 앞에 설 때까지,

아니, 그 문을 마침내 넘을 때까지 알 수 없다.


헌혈하면, 내 피를 주면, 나의 알라닌 분해효소라는 체성분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 어느 질병이 양성인지 음성인지 친절히 알려주던데

왜 저들은 내 성분을, 내 수치를 알려주지 않나?

난 이 문을 나아가 바다가 되고 싶어서

내 피, 땀, 헌혈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많은 시간을 주고 있는데.


일상에서, 삶 속에서,

어린 학창 시절에는 바닷소리인 줄도 모르고 소라고둥 소리인가 보다 하던 싸~~~ 하던 파도의 노래가 들려온다.

저마다의 바다를 꿈꾸는 이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오늘도 파도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원통한 이들의 울음과 같다던 저~ 울돌목의 우~하는 소리일지도,

어느 이국적 나무와 절벽들이 보이는 가운데 들리는 사~철썩 사~철썩 일수도,

피서기간을 맞아, 개장 이래로 제일 시끌벅적한 유명 해변의 즐거운 사람들 소리와 시원하게 깔리는 쏴아~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얼 하던, 어디에서나 들리던 그 파도의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이미 바다가 되어, 너무 익숙해진 덕일까?

이제 자신의 그리던 바다를 잊었을까?

애초에 바다가 아닌 들이나 산을 바라고, 향했을까?

어쩌면 그들의 바다는 저 높은 창공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들이 모이는 이곳이 시끌벅적한 까닭은,

저마다 파도의 노래에 이끌려 부푼 가슴으로, 절실함으로, 두려움으로 흐르는 초년의 이스마엘들이 복작복작하게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이스마엘들이, 다시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창작노트


창세기에서 영감을 확 받아버려서 일기 아닌 초단편 산문을 써낸 아침.

내 기준으로는 소설인데, 시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내서 그런가 보다.


흐름은 채용박람회를 떠올리며 그려봤다. 취업시장이 어렵다지만 그 흐름은 우울과 불안감으로 가득하지만은 않다. 설렘과 희망이 더 많이 보였고, 자신감 혹은 해내겠다는 다짐도 채워져 있다.

긍정적인 의욕과 긴장과 경쟁이 넘치는 분위기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나 들려오던 파도의 노래라고 표현. 이 '파도의 노래'는 사람들이 처한 환경, 운 등 여러 요소에 따라서 그 소리를 다른 소리와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스마엘'이라고 말하는 화자도 '돌고 돌아 다시'흐름으로 돌아와, 흐름이 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이야기인 것은 아니지만,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소설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아니면 말곸ㅋㅋ


나도 어서 해변을 넘어, 연안을 지나서, 대양으로 더 넓고 깊고 마르지 않는 큰 바다로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계속 '나는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이 외로워 보인다면, '나'라는 관점을 '우리'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며 읽어보아도 그럴싸한 마법~ㅋㅋㅋ ㅜㅜ 파이팅.


+영감의 원천을 메모해보자면,

(취업준비생의 모습: 이것저것 하다가 취업 준비를 한다/채용박람회를 간다)

+ (성경 속 '이스마엘' 이름의 의미. 창 16:11,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사람마다의 고통과 인내, 노력들이 적합하게 보상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 (뮤지컬 <모비딕> 넘버 "파도의 노래" 가사 중, '거친 산 대지를 누빌 때조차 넌 파도의 노랠 듣고 있었네')


+대학 재학 중, 캘리그래피 특강으로 만난 허수연 대표님의 선물. 내가 원하는 문구를 묻곤 써주셨다.

이 글의 영감 원천 중 하나인 "파도의 노래"넘버 가사 일부.

색칠은 내가 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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