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색다른데 익숙한 이 느낌.
내 대입 고난기, 취업 고배. 그 다음은?
대입 수능 시험 중에 받았던 컴싸(컴퓨터용 사인펜)를 오늘 버렸다.
다른 컴싸와 돌려가며 쓰기는 했지만, 예상 외로 내구도가 좋아 놀랐다.
이제 다 써서 버렸다.
나는 취준생이다. 나는 구직자다.
대입 시험을 보던 때와 지금이 겹쳐 보인다.
이것은 취업 고배를 들이켜고 있는 라떼is horse.
고3, 대입 수능을 100여 일 앞두고 비가 무진장 내렸다.
뉴스를 보면 서울 시내에서 차들이 개헤엄 치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도심에 물이 찼다.
그리고 우리 동네 강이 거진 10년만에 범람할 정도의 폭우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도 물이 찼다.
영화<기생충> 속 기정이네 같은 반지하도 아니었는데 물이 차올랐다.
갯벌에 밀물 밀려오듯이 마당에 물이 들어오더니 30분만에 집 안까지 닿았다. 제일 먼저 컴퓨터 부터 챙기고, 고3문제집, 교복, 수건 따위를 챙겨 2층 침대에 쌓아두고 나니 물이 무릎에 닿아 있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언제 그칠 지 모르고, 집에도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 모르던 상황.
천사같은 이웃들의 집을 돌며 다락방, 방 한 칸에서 감사히 신세를 졌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낮에는 엉망이 된 집에 가서 지원금을 받기 위한 증빙 인증사진을 찍었다. 물에 젖어 버려질, 오랜 추억이 담긴 사진들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며 찍었다.
어릴 적 듣던 자장가, 까치와 싸우던 걸 엄마가 몰래 녹음해두셨던 테이프, 의기양양한 모습 가득하던 재롱잔치 비디오, 수줍던 신혼시절 부모님의 결혼식 비디오는 손도 못 쓰고 버려졌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는 집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물 청소를 하고, 석고 보드로 가벽을 세웠고, 시멘트에 모래를 섞고, 실리콘을 쏘고, 도배도 했다.
한 여름이라 후끈한데 바닥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뗐고, 우리 집에 옷과 그릇이 이렇게 많았나 의문스러울 정도로 빨래와 설거지를 했다. 빨아둔 옷을 널기 위해, 이전에는 쓰지도 않던 쇠꼬챙이 옷걸이를 구하러 세탁소를 찾았다.
대체 디즈니 미녀와야수 사용인들은 얼마나 기대감에 차서 이런 노동 중에 노래를 했을까 생각하며, 차마 노동요를 틀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내 뇌에서만 Human again과 Be our guest를 무한반복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이웃의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EBS교재를 풀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감사하게 신세지던 작은 방에서, 곤히 자고 있는 가족들을 내려다보며 자소서를 쓰는 건 참 슬프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난 지금 제일 힘든데 "고난을 이겨낸 경험"을 쓰라고 하던 문항만큼이나 이상하고 슬펐다.
새로 바른 시멘트와 도배 벽이 마르기 시작할 즈음,
고3이라는 이유로 나는 복구작업에서 열외되었다.
보충 수업도 가는둥마는둥 하면서 혼자 수능공부, 지원서 작성을 했다.
그렇게 20여일 지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 해 수능시험을 봤고,
운 좋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이상,
오늘 수능펜을 버리기 전, 펜을 만지작대면서 괜히 떠오르던
그래서 꺼내보고프던 내 대입 고난기.
깔끔한 해피엔딩이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씨의 말에 3000만큼 동의한다.
침수 피해와 코로나19 딸린 취업난, 대입과 취업.
여태껏 내 인생에서 만났던, 그리고 지금도 마주한 어려운 장애물과 도전과제. 이 느낌은 새롭지만 오래된 기억같다.
지원서 쓰며 울고, 수능특강 풀며 울고, 화장실 갈 때마다 울고
끝없이 슬퍼하던 나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뤘었다.
오늘까지는 고배를 마시며 씁쓸해하던 나도
좀 더 지난 날에는 "넌 결국 목표에 닿았어"라는
스스로의 평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마도 나는, 이 도전을 완수한 뒤에
또 다른 내용의, 왠지 익숙한
오래된 미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생판 모르는 광경도 아니고, 오래된 기억과 닮은 미래니까.
새로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