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버스.
울퉁불퉁한 도로.
대관령 올라가는 산길처럼 꼬불꼬불한 오르막길.
집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어린 나는 창 밖으로 코와 입을 내밀고 힘껏 바깥공기를 들이마셔보지만, 어김없이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허옇게 질린 표정, 식은땀을 흘리며, 밖으로 밀려 나오려는 묵직한 기분을 꾹 참으며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버텼다.
"엄마, 버스 안 타면 안 돼요?"
대답 없는 엄마는 등으로 말했다. 너 혼자 걸어오든가, 버스를 타든가.
내가 어릴 때 엄마는 늘 바빴다. 어떤 상황에서든 실밥을 뜯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부업이라고 들고 온 포대자루에선 아빠가 입던 양복과 비슷한 마이가 산더미같이 쏟아졌고, 옷엔 얼기설기 실밥이 달려있었다. 실밥을 깨끗하게 제거한 후 다시 포대자루에 넣어 들고 가면 돈을 받았다.
빨리 집에 가서 하나라도 더 뜯어야 하는데 걸어가자고? 길 한복판에서 혼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어쩌면 혼낼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엄마 의중을 알아들었고, 무엇보다 혼나기 싫었다.
차라리 빈 봉지에 속에 든 걸 쏟아내는 한이 있어더라도,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더욱 차가워지고 매몰찬 한마디가 되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엄마 옷자락에 의지한 내 몸은 이리저리 흔들렸고, 잡고 있는 손잡이가 흔들리는 대로 휘청거렸다. 작은 버스 안 어디도 내 몸 하나 기댈 곳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내 손을 잡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공을 헤매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꽉 잡아줄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엄마가 혼내지 않고 아무 말하지 않는 게 차라리 덜 무서웠다. 언제 폭발할지 몰라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현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 하나로 나는 마음을 숨기고, 말을 삼켰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적절한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도 눈치를 봤던 그때. 무시가 익숙했고 거절도 당연했다.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엔, 잠깐 혼나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다.
누가 먼저 그랬을까.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그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기댈 곳 없이 힘들었냐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만 혼자 버텨내고 견디느라 혼자 사는 기분이었냐고.
슬픔, 두려움,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에서 늘 도망쳤다. 누군가의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길 거부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더 큰 상처가 될 테니까.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회피였다.
회피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숨기고 만나지 아니함이다. 유의어로는 도피, 기피 그리고 모면이 있다.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려 했고, 무한 긍정으로 포장했다. 남들이 보면 대범했으나, 나는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 었을 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쁜 감정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이 담긴 책을 만났다. 아이들이 나에게 힘들면 힘들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주양육자의 말과 태도를 따라 한다고 했으니까, 아이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는 동안 한 번도 입 밖으로 표현해 본 적 없는 감정 표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기에, 말은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내 감정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던 수 십 년. 아이들 덕분에 서툰 감정 표현을 시작했으니 어색할밖에.
"집안일을 도와줘서 고마워."
"지금은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어."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아직도 모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은 감정에선 여전히 도망치는 날도 있다. '감정에 빠져 있을 시간이 어딨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뒷모습이 나에게서 보일 때가 있다. 누구의 탓도 하고 싶지 않다. 맞서 싸우지 않기로 선택한 건 나였으니까.
지금은 회피하지 않기로 선택하면 될 일.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살길 바란다는 말을 할 때, 마음으로 다짐한다. 나도 그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