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은 다 하고 노는 거야?
그저 사랑이고 싶다.
"숙제는 다 했어?"
"할 일은 다 하고 노는 거야?"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확인하고 챙기는 것은 내 몫이었다. 지각하지 않게 깨워주고, 아이들이 준비물은 다 챙겼는지 미리 체크한다. 숙제는 물론이고 수행평가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곧 시험인데 문제집은 적당하게 풀고 있는지 체크하는 일까지.
모든 게 내 할 일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응원할 시간에, 지금 시작하도록 다그치길 선택했다. 한 아이가 하지 않으면 도미노처럼 다른 세 아이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한 아이가 시작하면 다른 세 아이도 불평은 할지언정 시작했으니.
처음엔 이유를 설명하며 아이들을 하나하나 이해시켰다. 똑같은 말을 매일 하다, 어느 날 설명해 줄 만큼 해줬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부터 투정은 대드는 것으로 여겨졌고,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거부당한 아이들은 불만이 쌓여갔으리라.
아이들이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몸에 배면 스스로 잘하는 아이로 자랄 거라 생각했다.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배고프면 밥 먹고, 일어나면 양치하는 것처럼, 오늘 할 일을 오늘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질 줄 알았다.
"아니요."
역시나 아이들은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방만 던져놓고 노는 걸 선택했다. 내 마음속 헐크가 깨어나는 시간.
"숙제부터 하고 노는 거라고 했지."
"알림장 가져와 봐."
엄마 입에서 숙제와 알림장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바짝 긴장했고, 가방을 챙기러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이들에게 왜 놀고 있는지, 언제부터 숙제를 할 건지 묻지 않았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냥 혼날 일이었다. 규칙이란 것도 아이들과 의논한 적 없는 일방적인 엄마만의 규칙이었다. 아이들의 불만 가득한 표정은 못 본 체 하고, 나는 내 할 일만 했다. 아이들의 하루를 체크하는 일.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이 동반됐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부터 매일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고, 책을 읽었으니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다고 믿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특별히 마음먹어야 하는 일로 여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 아니던가.
이제 특별히 마음먹고 시작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궁금한 마음에 책을 펼쳤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책을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마음만 조급해졌다.
책마다 아이의 올바른 습관은 엄마의 간섭과 잔소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할 의지가 생겨야 스스로 제 할 일을 한다는 것. 많은 육아서 속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도 뜻은 일맥상통.
아이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제 할 일을 정하면 스스로 하는 아이가 된다는 것.
우리 집 아이들에겐 '스스로'가 배제된 규칙들이 가득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문제집 풀이. 학년이 올라가면 심화과정 시작. 학원을 보내지 않으니 '이 정도'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는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내 생각만으로 결정된 분량이었다.
공부는 엄마에게 검사받아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알아서 하고 싶을 나이' 사춘기가 오면서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하는 방법을 모르니 쌓이는 공부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게 됐고, 하루 이틀 미루다 책을 밀어내고 말았다.
"계속 미루지 말고 하루에 한 장이라도 풀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쫌!!"
안타까운 마음에 한마디 보태면 두 마디 쏟아내고 방문을 닫았다. 마음까지 닫아버렸다.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한 큰애를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잘못된 듯 실패감이 몰려왔다.
알아서 하겠다고 고함지르고 문을 쾅 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형을 보니 부러웠던 아이들. 나도 하기 싫은데, 나도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쭈뼛거리다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을 보는 내 마음은 지붕을 뜯어내는 강풍을 동반한 태풍만큼 두려움을 몰고 왔다.
검색어에 사춘기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되는 책은 다 읽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전문가들의 조언. 독립을 응원해야 할 시기인니 지켜봐 주라는 설루션은 내가 원한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시 내 말을 듣는 방법을 말해주는 책을 찾으려 했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가 걷는 길이 안전하길 바랐다.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드리 피어있고, 크고 작은 돌이 없는 잘 닦여진 길만 걷길 바랐다. 갈림길마다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 혼란스럽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내 아이가 큰 어려움 없이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나만의 욕심이었을까.
내 마음은 왜곡되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퍼주었던 마음은 간섭과 통제, 변명이 되었다.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는 대화였다. 아이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일에 늦은 때는 없다는 글에 힘을 냈다. 아이의 차가운 눈빛, 삐딱한 몸짓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아이. 코웃음을 치던 아이. 한숨을 쉬던 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아이.
그 아이가 오늘은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진 않을 테니까. 오늘 배고프면 내일은 먹겠지.'라는 마음으로 뒷말을 삼켰다. 내가 퍼붓는 사랑이 간섭이 되지 않길. 그저 사랑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