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내면에 닿다
며칠 전 공황의 기저 원인을 찾아 정리했다. 처음 공황 관련 교육과정을 들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 내용 중에 하나는 공황은 하루 이틀 안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공황이 온 근본적인 이유가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하루 이틀 만에 온 것은 아니지만 가장 최근에 힘들었던 일이 공황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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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련 책을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런 내 생각에 의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게 몇 달간의 나를 지켜보며 그동안의 개인 사를 차근히 곱씹고 분석해 보니 저 깊이 숨겨져 있던 나의 내면의 원인까지 닿을 수 있었고 그 원인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계속 뿌옇게 드리웠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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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게 나타나는 모든 증상들이 그저 기저 원인에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나 자신과 분리가 가능해졌다. 나는 공황 중에 신체화 증상보다는 우울감이나 무기력 등의 정서화 증상이 심했는데 그런 증상을 겪고 있는 현재의 나를 과거의 생기 넘치던 나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내 성격이 공황 때문에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하고 좌절했다. 즉 나 자신을 증상과 동일화시켰고 그것이 더욱 우울하게 했다. 과거의 특정 원인이 나를 결국 공황으로 몰고 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내 행보를 보면 나다운 선택들을 해 왔다. 공황 증세가 온 후 나 자신을 영영 잃어버렸고 못 찾을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는데 정리해 보니 나는 여전히 나였다. 다만 과거에 따른 결과로 공황 증세가 왔던 것뿐이었다. 이 사실을 정리하니 비로소 증상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졌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분명해지고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은 일요일 아침이었고 잘 자고 일어난 덕에 컨디션이 좋아 차를 끌고 곧장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곳에서 꽃도 사고 커피도 샀다. 호숫가 앞에서 커피 마시며 책을 읽으려고 공원으로 향했는데 웬걸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호수가 심상치 않더니만 온 동네가 세차고 시원한 파도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에이 오늘 책 읽기는 다 글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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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금 앉아 있는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벤치를 좋아한다. 거기서 호수를 내려보고 있노라면 이 커다란 호수가 모두 내 것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 여기서 내가 단독으로 전세 낸 건 맞으니까. 이 순간만큼은 오대호 중 하나가 다 내 거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찬 파도는 마치 박력 터지는 남자의 거친 포옹처럼 보였다. 이제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너의 마음의 찌꺼기들은 내가 다 쓸어버리겠노라고. 자기가 다 가져가겠노라고. 너는 이제 다 괜찮다고. 그렇게 파도 품에 안겨 내 마음을 씻고 왔다. 넓디넓은 끝이 안 보이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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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 파도 멍을 때리다가 차로 돌아오는 데 거리는 파도 소리로 가득 찼고 낙엽과 꽃내음이 뒤섞인 바람 냄새가 났다. 이 계절의 바람 냄새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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