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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팅게일 Dec 17. 2022

부러진 의지 옆, 전에 없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다.

공황장애 극복기 - 기적이 일어난 순간

아침 산책 @레이크온타리오


지난 10월, 다시금 몸과 마음이 마구 무너져 내렸다. 운동을 한 달 반 가량 못하게 되면서 무기력과 우울감이 극에 달했고 그로 인해 다시금 엉망이 되었다.

그저 공황의 기저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극적으로 좋아지거나 갑자기 모든 것이 완벽해진다거나 증상이 사라지진 않는다. 다만 기저 원인을 몰랐던 시절에는 사방이 어둠뿐이라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터널인지 터널 초입에 들어섰는지, 끝인지 아니면 터널이 맞기나 한 건지.. 온 사방을 둘러보고 손으로 만져봐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그래도 기저 원인을 안다는 것은 그러 한 상황에서 전등 아이템을 획득한 것과 비슷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굉장한 아이템이긴 하지만 전등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있는 곳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걸 가지고 벗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기분에 따라 운동하지 말자. 적어도 지금까지 공황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운동 - 내게는 수영인데, 이건 확실히 도움이 된다. 운동한 날에는 확실히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덜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컨디션이 좋고 기분이 괜찮은 날에만 운동을 했다. 어떻게 얻은 전등 아이템인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등을 환히 밝히며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내 몸을 일으켰다. 의구심, 가서 뭐할 거야, 나를 부정하는 말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었지만 억지로 억지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래, 약을 안 먹을 거면 최소한의 치유 노력은 해야지.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무기력에 잡아 먹혀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부터 기분에 따라 운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틀 수영하고 하루 쉬는 루틴을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매일매일 5분 확언/명상도 시작했다. 중간에 생리 기간에는 쉬었고 그 이후에는 해당 루틴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걸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시간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덕분이고 여러 다른 요인과 환경이 겹쳐서인 것도 맞다. 하루아침에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좋아졌다는 뜻일 거다. 한 달 중 15일 수영장 가기 + 매일 명상하기, 이 두 가지 목표를 세웠고 지난 11월 목표를 달성했다. 이런 성취감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


결론적으로 성공했지만 매번 수영장에 가는 것은 흡사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내 몸을 겨우 겨우 일으켜 세워 수영장에 내 몸을 데려다 놓는 것도 힘들지만, 수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무기력과 하기 싫은 마음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눈 딱 감고 10바퀴 돈다를 목표로 했다. 중간중간 숨이 가쁘면 쉬기도 하면서 10바퀴를 돌았다. 그다음 날도 10 바퀴. 그다음 날은 쉬고. 다시 그다음 날 10바퀴. 열 바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지루하다. 왜 이렇게 한참 남았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내 옆에 있는 백인 할아버지는 유유히 천천히 잘도 돈다. 부럽다. 아 몰라 그냥 한다. 아무 의미 부여하지 말고. 한다. 이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니까.

가끔 새벽 수영도 갔다. 


신기한 점은 이런 루틴을 시작한 지 약 3주 만에 아주 미세한, 미약하게 아 뭔가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는 점이다. 끝도 없는 무기력함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살아 뭐해, 등등에 시달린 나에게 뭔가 해보고 싶어!라는 마음이 든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낯설었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다가 부루펜 한 입 먹으면 열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낫는 것 같은 느낌. 공황 장애 판정을 받고 처음 약을 먹었을 때는 그 약이 나와 잘 맞아서 약 먹고 난 직후 몇 달간은 바이브가 참 좋았는데, 그때는 뭘 되게 막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바이브를 잃어버렸는지 아니 그보다 땅굴로 파고 들어간 느낌으로만 수개월째였는데 이런 아주 작은 변화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운동 루틴인지 매일 하는 명상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다 작용한 덕이겠지만,) 여하튼 변했다. 나는 이제 조금씩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게 너무 신기하다!!!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였다. 그 귀하디 귀한, 소중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날달걀 티 스푼에 조심조심 안고 가는 마음으로 소중히 다뤘다.


그간 나는 내 의지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다. 부러진 의지, 부서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산산 조각난 마음의 파편들을 주워 모았고 그 과정에서 파편에 찔려 다시금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고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수라고 생각했기에 참고 견뎠다. 하지만 이젠 깨닫는다. 부러진 것을 다시 고치는 것이 아닌, 부러진 것 옆에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이 탄생한 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처럼.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진짜 기적은 자발적으로 치유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자신의 질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라고.


기적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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