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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팅게일 Jan 21. 2024

내가 캐나다로 떠난 이유(상)

내 인생에 영화같은 순간 2 

지난 2016년 5월, 저는 캐나다로 제 인생의 두 번째 나 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해 2월 재계약이 무산되어 갑작스레 무직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랜 이혼 소송을 끝낸 직후의 피로감과 특히 대학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장을 찾을 새 없이 임신 및 출산을 하고 이후 준비 없이 시작한 교사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던 시절이었죠. 무엇보다 처음 두 달만 일하기로 했던 학교에서 5년을 근무했는데 그 시간 동안 모든 교사가 갖고 있는 나만의 교사상과 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웠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보람도 느꼈고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이 일을 평생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매일 밤 떠나지 않았죠. 특히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정작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왕 무직이 된 김에 영어권 나라에 가서 여행 겸 짧은 어학연수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저는 하고 많은 영어권 국가 중에 캐나다, 그것도 토론토를 선택했을까요? 

이야기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당시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15살 중학생이었고 영어라는 언어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영어에 빠지게 된 것은 당시 다니고 있던 외국어학원의 캐나다 원어민 선생님 Mark덕분이었어요. 원래는 저도 남들처럼 입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가 한 친한 친구의 '우리 외국어학원 같이 안다녀볼래?' 라는 제안으로 친구 따라 외국어학원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제 고향은 대전인데 당시 외국어학원이라고 하면 시내에 ‘민병철 어학원’이 가장 큰 어학원이었습니다. 다른 학원에는 영어회화반은 오로지 성인반밖에 없었는데 오직 민병철 어학원에만 중-고등학생반이 따로 있었죠. 

첫 수업을 받고 느꼈던 행복한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소규모 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며(심지어 선생님을 부를때도 그의 이름을 불렀죠) 롤플레이와 게임을 하는 그런 수업이라니 그전까지 제게는 수업이란 그저 영어 문법을 외우거나 달달 책을 암기하는 그런 공부였는데 그 당시 첫 수업은 정말인지 신박한 그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그런 수업 방식이었어요. 게다가 언어는 그 문화를 배운다고 하지요. 남 눈치 안 보고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문화, 아무리 이상한 의견과 생각이라도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넘어가던 원어민 선생님들의 태도는 정말인지 너무나 ‘쿨’ 해 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영어를 좋아하게 되었고 일주일에 세 번 가던 그 수업을 매일 매일 기다렸습니다. 선생님께 한마디라도 더 말 붙여 보고 싶은 마음에 따로 영어공부를 시작했죠. 당시 저희 어머니는 홀로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그 덕에 최신 잡지나 책을 자유롭게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중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 책을 우연히 보고 매일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죠 - 굿모닝 팝스는 매달 한 영화를 선정해 매일 영화의 주요 대사들의 특정 표현을 공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저는 매일 아침, 그날의 대사를 듣고 학교에서 하루종일 내용을 암기한 후 사전을 찾아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나만의 다이얼로그를 만들었습니다. 방과 후 학원에 가서 외국인 선생님들에게 그날 만든 다이얼로그 대사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 가보는 것이 저만의 영어공부방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저의 학창 시절 중에서 최고로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외국어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원어민 선생님들을 꽤나 귀찮게 했고,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저희가 학원에 가면 선생님들이 도망가거나 각자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글 정도였어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당시 원어민 선생님 중 한 명이었던 Mark는 성격이 순둥 순둥하고 우리의 장난을 늘 끝까지 웃으며 받아주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We know you love Marshall! Come on say love her and marry her!” (몰려다녔던 친구 중에 Marshall이라는 성격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라고 놀리면 선생님은 황당해하며 “You guys are too young to marry.”라고 타이르듯 대답하던 게 전부였죠. 그 당시 전 허세와 장난이 가득한 중2였고 무슨 일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도 수업 중에 그가 하는 말마다 말대답을 하다가(제 딴엔 장난이었습니다) 그 순한 Mark가 수업중에 제게 엄청 화를 내고 나가 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전 그 이후에 우물쭈물 사과의 말도 제대로 못 한채 흐지부지 하던 중 Mark는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했던 선생님들 중 Mark만이 유일하게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그 이후부터 Mark 선생님과 저는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대학 진학 후로는 편지가 어느덧 이메일로 바뀌었고 연락은 MSN 메신저로 이어졌지요. 그러다 2007년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서로 각자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청첩장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아직도 서로 갖고 있어요!) 이후 바로 이어졌던 출산, 육아, 취직, 이혼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자연히 Mark선생님도 서서히 제 인생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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