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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24. 2024

귀소본능

[몸의 기록] 서로

“이걸 하지 않으면 분명 나중에 따님이 코 수술을 해달라고 할 거예요.” 


의사가 구강을 3D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했다. 약간 긴장한 채로 의사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나는 순간 벙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우리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의사는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 


“지금 교정을 해두지 않으면 콧대가 낮은 게 더 도드라지게 될 거고, 그럼 코 수술을 하고 싶어할 거라고요.” 


교정을 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뿐이었다면 교정을 하지 않았으려나. 아랫니가 윗니를 계속 쳐서 그대로 두면 앞니가 점점 더 벌어질 거라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고심 끝에 교정을 하기로 했다. 그날로부터 2년 동안, 그러니까 16살에서 18살이 될 때까지 나는 안동과 압구정을 오가며 교정 치료를 받았다. 치과는 압구정 한복판에 있었다. 혼자 압구정 거리를 거니는 것은 십대 청소년이었던 나에게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 얼굴에 거즈 같은 것을 붙인 사람들, 심지어 얼굴에 붕대를 두른 사람까지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사람들이 그냥 너무 … 아파 보였다. 왜 저렇게까지 얼굴을 바꾸려고 할까, 얼굴을 바꾸면 저 사람들의 인생이 정말로 바뀔까 …. 안쓰럽고, 약간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이고, 아픔과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얼굴을 바꾸려고 했으니까, 나도. 


내 입은 아빠 입을 닮았다. 입이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고, 입술도 도톰한 편이다. 앞니가 크고, 교정을 하기 전에는 약간 벌어져서 틈까지 있었다. 교정에 든 돈은 전부 아빠가 냈다. 자신과 닮은 입을 가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 입은 그다지 예쁘지 않구나, 처음으로 자각했다. 치과 한 벽면은 이 치과에서 교정을 한 연예인들의 사진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투명 교정으로 유명한 치과이다 보니, 티 나지 않게 교정을 해야 하는 연예인들의 선택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저 사람도 교정을 했다고? 저 사람도? 괜한 배신감이 들었다. 자연 미인인 척하더니만. 웃긴 건 연예인들의 사진을 볼수록 교정을 마친 뒤 바뀐 내 얼굴을 기대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저 사람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내 얼굴도 (지금보다는 더 낫게) 바뀌겠지, 하고. 


교정을 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다.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받고 오면 일주일은 죽 같이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잇몸이 은근하게 조여지는 통증을 느끼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통증이었다. 분명 이가 잇몸에 들어있는데, 다 빠져 있는 느낌. 헐렁해진 잇몸과 맥을 차리지 못하는 이는 쌍으로 내 식사 시간을 괴롭혔다. 한편으로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교정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되기도 했다. 조여진 철길 아래에서 열을 맞추어 느릿느릿 이동하는 이를 상상하면 조금 귀엽고, 조금은 가엽고 ….


문제는 발치였다. 위아래 작은 어금니 4개를 뺄지 말지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선택을 끝까지 미루다가, 결국 발치 예약을 잡았다. 이를 뽑아야 입이 드라마틱하게 들어갈 거라는 말에 마음이 이를 뽑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픔을 조금만 더 참아서 쏙 들어간, 세련된 입을 가지고야 말겠다, 뭐 이런 거창한 포부는 아니었고. 이왕 돈 쓴 김에 … 제대로 하자, 쪽에 가까웠다. 발치 예약을 잡은 당일에도 치과 대기실에서 2시간이 넘도록 엄마와 고민했다. 정말로 생니 4개를 뽑을 것인가. 이 4개 없이 평생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아찔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예상되는 아픔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우물쭈물 들어간 진료실에서 이 4개를 뽑는 것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더 빨리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수술대에 눕자마자 울음이 터진 바람에 좀 늦게 끝났다. 무서워서 엉엉 울면서 치아 뿌리가 뽑히는 것을 온 입으로 느꼈다. 이가 뽑혀 나간 자리에 커다란 솜을 끼웠다. 솜은 금새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유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치위생사 선생님이 이를 뺀 자리에서 나오는 피는 뱉어 내면 안된다고 했다. 이를 빼고 나서 몇 시간 동안 입 안에 난 커다란 구멍 4개에서 쿨럭쿨럭 나오는 피를 꿀꺽꿀꺽 삼켰다. 교정기를 혀로 확인할 때 나는 철 맛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철 맛. 엄청나게 비린데 엄청나게 고소하기도 하고. 실컷 피 맛을 봤다. 


그렇게 교정이 끝났다. 교정 장치를 빼고 혀로 이를 쓱 훑는데 기분이 요상했다. 가지런한 이가 상당히낯설었다. 거울 앞에 한참동안 서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쑥 들어간 입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교정기를 떼고 집에 돌아온 밤에 엄마도 한참동안 내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울었다. 이전 내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서 갑자기 슬퍼졌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입이 들어갈 것만을 기대하며 지난한 고통을 견뎠는데. 엄마는 내가 그토록 애써가며 없애려고 했던, 튀어나온 입을 그리워하고 있다. 혼란스러웠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난 2년을 견뎌 온 것일까. 나란히 정리된 이와 그렇지 못한 헝클어진 머릿속. 나는 그걸 또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교정기를 벗어 던지자마자 다시 나를 옭아맨 것은 후속 처리들이었다. 먼저 치아 뒤에 얇은 철사인 고정 장치를 붙였다. 2년간 교정기에 걸려 제대로 양치를 하지 못한 탓에 조금 누래진 이를 되살리기 위해 치아 미백도 3회나 서비스로 받았다. 미백을 받은 날이면 늘 이가 시렸다. 하얀 이가 오들오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치아 미백 서비스를 끝낸 다음에는 잘 때마다 껴야 하는 휴대용 유지장치를 주문 제작해서 받았다. 내 잇몸에 꼭 맞는 선홍색 유지 장치였다. 치위생사 선생님은 유지장치를 끼지 않으면 언젠간 이가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거듭해서 경고했다. 이는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습성이 있다고. 이 틀니같이 생긴 것을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다니. 앞날이 깜깜했다. 교정을 끝낸 뒤 한 3년은 유지장치를 열심히 꼈다. 며칠이라도 유지장치 끼는 것을 거르면 그새 이가 움직였는지 장치를 끼워 넣을 때 뻑뻑한 느낌이 났다.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먹다가 고정 장치를 몇 번 끊어 먹고, 유지장치를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치과에 몇 번 더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귀찮아졌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유지장치를 끼지 않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 그 조그만 선홍색 틀니는 내 시야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살던 시절 늘 나의 생사와 함께 유지장치의 행방을 확인하곤 하던 엄마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만에, 내 입은 완전한 해방을 맞았다. 


최근에 거울을 보다가 문득, 이전보다 입이 튀어나왔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로 그냥 가만히 있을 때에도 입이 나와 있는 것을 괜히 느끼곤 했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이가 벌어지며 입 안 공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먹던 떡에 앞니가 벌어진 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실감이 났다. 이가 돌아오고 있구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구나. 내 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응원하고 싶다. 집을 떠나오는 과정에서 어금니 4개를 타의로 잃었지만, 부지런히 나고 있는 사랑니 4개가 그 자리를 채울 예정이기에 여정을 시작할 정원은 충분하다. 32개의 이들이 힘을 모아서 뭉툭한 입을 탈환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자유함을 온 입으로 느낄 순간을! 그럼 나는 이 사이에 생긴 틈새로 신명 나는 휘파람을 불어 내보내야지. 여전히 낮은 코로 멋들어지는 콧노래도 불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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