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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24. 2024

마침내 발가벗기

[몸의 기록] 몽

“하 시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너무 뜨겁다. 굉장히 태연하고 나이스 한 미소로 노파심 가득해보이던 카운터 직원에게 “Sure, no worries”라고 말한 게 불과 몇 분 전 일이다. 진심으로 그냥 돌아갈까 생각해 본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쓴 돈을 생각해 보자. 버스비에 입장비까지 합치면 이미 유럽여행 이틀 생활비를 초과했다. 이번 한 번의 용기로 얻게 될 해방감도 생각하자. 그래, 해방시켜야 한다. 이놈의 몸을. 이놈의. 몸을. 해방시키자! 굳게 마음을 다잡고 탈의실 밖으로 나온다. 옷은, 없다. 한 노부부가 몸에 수건을 두른 채 사우나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몸에 수건을 두르고. 들어간다. 결연히 ‘후 -’ 내쉬는 숨이 떨린다. 


처음부터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몸을 해방시킨다.. 그 의미가 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 알 수 없는 죄어옴의 감각을 따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의식 끝에 둔탁하게 걸리는 몇몇의 기억들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건… 단상, 내 키보다 높게 쌓여있던 나무 단상들이다. 교회 뒷산 오두막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주로 크리스마스 행사에 쓰여서 봄, 여름, 가을에는 나와 내 친구들의 차지였던. 8살이었고, 어린 남자들보다 강해 보이고 싶었던 나에게 그 단상에서 멋지게 점프를 해내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가장 낮게 쌓인 단상에서부터 가장 높게 쌓인 단상까지 차근차근 밟아 올라, 마침내 가장 높은 단상 위에 섰다. 조금 긴장한 몸을 웅크렸다가, 하나둘셋, 하면 긴장을 풀고 그대로 점프. 1초. 휙휙 하는 바람이 귀 옆을 스쳤다. 허공에 있는 짧은 순간, 몸과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착지. 뛸 때 무릎에 입술을 부딪혔는지 입술 안쪽이 조금 얼얼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봤지 애들아? 이렇게 몸에 힘을 풀고 하는 거야.” 뛰고 놀고 다치는 것 외에는 아직 이 몸의 안과 밖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의 기억이다. 


노부부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샤워기들과 음.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다. 어리바리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마찬가지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갈색 머리 여자가 다가와 처음이냐고 묻는다.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자 여자가 친절하게 벽에 적힌 순서대로 이동하면서 사우나를 즐기면 된다고 알려준다. 1번 몸에 물 묻히기.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샤워기 아래에서 몸에 물을 묻힌다. 그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이제 옷을 입지 않은 게 부끄럽지 않게 느껴진다. 2번 건식 사우나. 2번 방으로 들어오니 열기가 훅하고 느껴진다. 발을 디딘 돌바닥이 너무 뜨겁다. 얼른 겅중겅중 뛰어 일렬로 놓인 나무 침대 위에 수건을 깔고 눕는다. 뜨거운 열기에 살에 맺혔던 물방울이 버석하게 마르는 감각이 좋다. 3번. 더 뜨거운 건식 사우나. 몸 깊숙한 곳까지 차오르는 온기에 살짝 잠에 든다. 


다음 기억은 11살 때의 기억이다. 그 무렵 나는 한 달에 한 번 큰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반에서 제일 키가 크고 노래를 엄청 잘하는 민서도, 볼살이 빵빵하고 말을 야무지게 잘하는 가영이도 매달 간다고, 그 애들에 비해 나는 좀 늦게 시작한 거라고 했다. 병원에 처음 가던 날, 이런저런 피 검사와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만나게 된 남의사는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내 가슴을 만졌다. 그러고는 다시 엄마에게 내 몸을 뽑고 찍고 만져본 소견을 말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많이 조숙하네요. 이대로라면 150 후반까지 밖에 못 클 겁니다. 이제라도 오길 잘하셨어요.” 또 의사는 나에게, “먹는 거 좋아하지? 근데 햄버거 하나 먹으면 수영을 30분 해야 해. 할 수 있겠니?”라고 했다. 숨이 찼다. 그 진료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대상이 된 나의 몸을 마주했다. 의사는 그 몸이 정상의 한참 바깥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는지, 어쩌다가 주사를 그만 맞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일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어떤 당혹감인데, 그것이 이후의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움켜쥐고 흔들었다는 걸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알겠다. 


4번 습식 사우나. 어두웠던 이전 방과 다르게 여기는 아주 밝고, 옆 사람과도 더 가깝다. 문득 지금 이 상황을 객관화해서 보려는 충동이 인다. 제법 웃길 것 같다. 어린. 동양인. 여자애가. 발가벗은 채. 땀을 흘리며. 혼자서. 사우나를 하는. 상황. 그 이미지를 떠올리자 알 수 없는 죄어옴이 다시 느껴진다. 렌즈를 안 끼길 잘한 것 같다. 내 몸을 또렷하게 볼 필요는 없다. 몸이 감각하는 분명한 만족감을 느끼자. 5번 더 뜨거운 습식 사우나. 흐릿한 시야로 이 공간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본다. 배에 살이 많은 사람, 허벅지에 살이 많은 사람, 몸 전체에 살이 별로 없는 사람, 근육이 많은 사람, 피부가 흰 사람, 피부가 갈색인 사람, 털이 곱슬거리는 사람, 털이 검은 사람, 털이 옅은 색인 사람… 몸이 아주 많다. 이 중에서 정상인 몸은? 없다. 비정상인 몸은? 없다. 내 몸은? 내 몸. 


떠오르는 기억이 많아진다. 병원 이후의 기억들 속에서 나는 늘 부끄러웠다. 무엇이? 아마 이 몸이. 그런데도 그 몸을 더 또렷하게, 멀리서 보려 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비해 내 몸이 얼마나 크거나 작은지 가늠했던 기억. 의자 등받이의 뚫린 구멍 사이로 살이 튀어나올까 봐 편히 등을 기대지 못했던 기억. 학교에서 단체로 신체검사를 할 때 몸무게가 노출될까 겁냈던 기억. 옷 가게 탈의실에서 바지에게 거절당했던 기억. 펑퍼짐한 옷만 입었던 기억. 조용히 나를 불러낸 교사가 흰옷 아래 속옷이 비친다고 주의를 줬던 기억. 기억들이 끝도 없이 샘솟는다. 부끄러움의 기억은 어느 순간부터 실패의 기억으로 이름을 바꾼다. 적게 먹고 운동하는 것에  번번이 실패했던 기억. 무기력에 사로잡혀 침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 그리고 결국엔 이 몸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끄적였던 기억. 이 기억들의 끝은 어디일까. 끝나긴 할까? 


6번 미지근한 탕. 가로로 긴 방안에 있는 수영장처럼 생긴 탕 속에서 연인, 친구, 부자 관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중 한 남자가 내 몸을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도 그 남자의 몸을 바라봐 준다. 7번 차가운 탕. 사우나 정중앙의 높고 커다란 돔 아래에 커다란 원형 탕이 있다. 나는 ‘흡-’ 하고 숨을 참으며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근다. 차가운 감각에 머리끝에서부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두리번. 나이스! 아무도 없다. 얼른 물을 가로지르며 헤엄친다. 접영과 개헤엄 중간쯤의 어떤 헤엄으로 물을 가르며 나아가다가, 끝에 다다르면 꼬르륵하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높은 천장을 본채로 누워 물 위에 둥둥 뜬다. 물속에 잠긴 귀에는 내 숨소리만 들린다. 다시 꼬르륵.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계속해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발가벗은 채로! 


-


엄마에게만 말하지 않을 작은 비밀을 가슴에 품고서 한국에 돌아왔다. 그 비밀은 아주 작아서 대부분의 시간에는 잊고 살지만, 나는 이따금 꺼내서 확인하곤 한다. 비밀, 거기 잘 있지? 그러면 비밀은 잘 있다고, 아직 여행 쿨타임 안 찼다고 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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