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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24. 2024

어지럼증

[몸의 기록] 지수

웅크려 앉는다. 이렇게 한없이 작아지다 사라지면 좋겠다고. 있는 힘껏 몸을 말아넣는다. 찬 냄새가 난다. 아닌가. 시선이 발끝에 멈춘다. 열 발가락이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괜시리 부끄러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멍때리던 나는 내 오른엄지발가락을 바라본다. 꼼지락. 나에게 잘 보이고 싶기라도 한 건지, 두 작은 산맥이 나란히 올라와있다. 쟤네가 언제부터 있었더라. 13단지, 빨간색,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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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퍽!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물소리와 말소리, 호루라기 소리들이 이리저리 뒤엉켜서 연신 웅웅거린다. 분식집 갈 생각에 잔뜩 신나있었던 것 같은데. 빨간 것이 올라온다. 규은이가 소리치며 뛰어온다. 뛰면 안 되는데. 뛰면 다치는데. 

강사쌤이 나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피가 나고 있었다. 울었나. 그건 잘.. 규은이가 안절부절하며 내 옆에 서있다. 앗 따가. 소독약이네. 솜을 발가락 위에 고정해주셨다.   

물에 닿으면 안 된다는 쌤의 말을 되새기며, 규은이의 부축과 함께 샤워실로 향했다.

난 한 쪽 다리를 쭉 뻗은채로 힘겹게 옷을 벗었다. (왜 수영복은 이렇게 벗기 힘들게 만든것일까..) 내가 다친 것을 보고 잔뜩 긴장해있던 규은이는 내 어정쩡한 꼴을 보더니 와락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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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 어떻게 됐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규은이모께 갔던 것 같다. 수영장 바로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무언가 먹긴 먹었는데… 아마 겨울이었으면 컵떡볶이, 여름이었으면 와플을 먹었겠다. 집에 가서 어떻게 됐더라. 병원은 안 간 것 같고. 할아버지께서 많이 걱정하셨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애초에 어렸을 땐 조금 칠칠맞은 성격과 약간의 모험심 때문에 몸 위에 멍자국이나 흉터같은 것들은 꽤 흔했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저 흉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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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지던 나는 꼼지락거리기를 멈추고 가만히 산맥을 바라본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진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 동네를 떠난지도 6년이 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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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을 지나 12살이 되었을 때, 나는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전에 살던 곳도 물론 차로 5분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초수도권이었지만, 행정적으로 서울에 살게 된건 10년만이었으니까. 역시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은 힘들었고 그 동안 나름의 방향으로 많이 변했다. 며칠 전,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오래된 그 동네를 들렀다. 그 곳에서 계속 살고있는 친구들과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어느정도의 변화는 예상했었으나,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커다란 건물이 생겨서 운동장이 보이지 않았고, 어렸을 적 나의 모험터였던 옆단지는 재건축으로 아예 예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은 로컬빵집. 미련이 남아서인지 빵냄새가 나를 잡은 것인지, 소금빵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짭짤하고 고소한게 참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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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기억. 산맥이 꿈틀거린다. 어렸을 적 얘기를 하는 듯. 락스냄새가 났다. 피냄새인가. 달달한 사과잼과 생크림의 냄새, 또는 뜨겁고 맵고 뭉근한.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매연이 일고, 불쾌한. 오른발이 시리다. 오른발이 울렁인다. 눈이 부신가, 호프집이 벌써 열었나. 발가락이 있나. 발가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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