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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24. 2024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몸의 기록] 퍼핀

 제목은 2021년 발매된 이랑의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에 수록된 동명의 곡의 원제를 인용.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 버려진 빈 병을 유난히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어떤 사람을 (…) 파괴적인 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을 찾아 돌아가려는 /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어떤 혼잣말을 상상해본다”.


점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왼쪽 등 뒤에 위치한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짙은 몽고반점. 목욕을 하고 나면 늘 벗은 몸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점을 모두 그려보았다는 애인의 말을 떠올린다. 애인은 조각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새로운 것을 보면 늘 만지고 싶어 했다. 귀여운 털 동물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도, 새 이불을 샀을 때도, 내가 일기장을 처음 읽어주었을 때도. 그것의 용도나 쓰임을 판단하기보다는 자신의 손끝으로 감각하기를 원했다. 그 당시 애인은 흙을 만지고 다듬어서 모양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주로 했는데 흙을 만지기만 해도 그 흙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알갱이의 크기, 촉촉함의 정도, 손안에서 퍼지는 정도……그 밖의 내가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로 애인은 모든 것을 알고는 했다. 손을 옷 속으로 넣어 등 뒤의 나의 점을 만져본다. 주변의 살결과는 다른 표면. 솜털이 없고 매끈하지만 동시에 조금 울퉁불퉁함. 아무리 만져보아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괜히 손을 조금 더 길게 뻗어 점을 만져본다. 애인은 내 점을 만지면서 무엇을 알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점을 만졌을까. 그리고 왜 점을 모두 그렸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것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애인의 오른쪽 콧방울에 위치한 작은 점을 생각한다. 애인은 그 점도 그렸을까? 두꺼운 안경테를 벗겨야 볼 수 있는 그 점을 나는 참 좋아했지만 역시 그 정도가 전부다. 애인이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낯설어지는 기분이다. 애인이 나를 감각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하나 더 있다는 것은 분명 기쁜 것이지만, 내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애인의 얼굴을 볼 때면 정말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며 울고 싶어진다. 


가장 낯선 얼굴의 애인을 생각하면 그해 10월이 생각난다. 분명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던 날이었다. 쏟아지는 안부 연락에 우리는 우리가 안전한 상태임을 전달해야 했고, 동시에 죽어가는 신체들이 폭력적으로 찍히고, 그와 동시에 무분별하게 전달되는 상황을 계속 눈에 담아내야 했다. 울음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한 채로 계속 계속 말하고, 계속 계속 봤다. 늘어가는 숫자가 제발 멈춰주기를 바랐고, 조금 더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숫자 속에 나의 친구들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애인의 얼굴을 봤다. 도무지 읽을 수 없어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 것 같은  그 낯선 얼굴. 이미 울고 있었지만 더 울고 싶어졌다. 그때 멍하니 죽어가는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던 애인이 내 등을 더듬었다. 애인의 손은 조금씩 위치를 움직여 내 점 위로 온다.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하게 애인은 나의 몽고반점을 만진다. 너무 커다래서 부정할 수도 없는 그 점. 분명 애인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날은 해가 뜬 후에나 겨우 얕은 잠에 들었다. 꿈속의 나는 어떤 해의 4월에 있었다. 역시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던 그해의 4월에 나는 마찬가지로 어떤 화면 앞에 앉아있다. 화면 속에는 겨우 물 밖으로 나온 어떤 신체를 부여잡고 중년의 여성이 울고 있다. 추리 소설에서 읽었던 익사체에 대한 묘사를 생각한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풀어 오르고, ……, 그리고 그런 종류의 묘사들을.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신체들. 그 신체들까지 떠올리자 등 뒤에서 감촉이 느껴진다. 손은 옷 속으로 들어와 나의 점을 조금씩 쓰다듬는다. 분명 잠에 들지 못한 애인일 것이다. 내가 절대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듯 조심성 없는, 그러나 애정이 담는 손길. 실눈을 뜨고 있다가 이내 다시 잠에 든다. 기억나지는 않는 다른 꿈을 꾼다. 어쩐지 애인이 울고 있었던 것만 같다.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목욕을 한다. 거품으로 온몸을 문지르고 다시 닦아낸다. 머리를 말리려고 하다 거울 앞에 멈춰 선다. 점이 보인다. 젖은 머리로 거울 앞에 앉아 나의 모든 점을 그려본다. 손목에, 가슴 아래에, 허벅지 뒤에, 오른쪽 새끼손가락에……그리고 왼쪽 등 뒤에. 하나씩 점을 만져보고 그 모양새를 그려낸다. 점은 어떻게, 언제 생기는 것일까. 어떤 점은 왜 자꾸 커지고, 어떤 점은 왜 자꾸 사라지는 것일까. 그리고 애인은 점을…….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신체일 나를 상상하고, 어떤 신체인 나의 점을 알아볼 애인을 상상한다. 그리고. 어떤 신체들이 가졌을 점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신체의 점을 만졌을 여러 손을 생각한다. 그 점을 그리워할 여러 손을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신체의 점을 감히 그리워한다. 


밤이면 다시 얇은 옷을 입고 애인과 몸을 맞대고 눕는다. 애인의 두꺼운 안경테를 벗기고 오른쪽 콧방울의 점을 장난스럽게 누른다. 목, 가슴, 손목의 안쪽, 발목. 애인의 점을 하나씩 만져본다. 노곤한 듯 잠에 들려는 애인의 손을 잡아 나의 몽고반점 위에 얹는다. 애인은 익숙하게 나의 점을 만진다. 얼굴을 애인의 몸통 가까이에 댄다. 일정하게 두근거리는 애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우리의 몸은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서 항상 두근거리고 있어. 여전히 알 수 없는 애인의 품에 안긴다. 어쩌면 애인이 나의 점을 만지며 나의 심장 소리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않더라도……. 애인의 점을 생각한다. 애인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 그렇게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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