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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Mar 22. 2024

미안함

고물상에 안 쓰는 컴퓨터 본체와 재활용 종이 한 박스를 넘기고 돌아 나오는 뒤통수에 대고 주인이 날 부른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네며 받아가라 한다. 고맙다는 인사 하며 받긴 했는데 내심 폐지 줍는 할머니 리어카에 실어다 주고 그분이 받으시게 할 걸 그랬나 싶었다. 한데 폐지 줍는 노인이 언제 지나가는 줄 알고 기다리냔 말이다.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니 시간 되는대로 직접 고물상에 가져왔는데 아마 고물상 입구에서 그분들을 만났어도 리어카에 실어주었을 테다. 괜스레 미안하다. 이런 일에 미안함을 느낀다. 그게 나다.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지 못했나 보다.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또한 나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거의 모든 시술을 내가 받는데 대체 누구에게 미안한가? 어젯밤 마음이 찢어지게 미안함을 느꼈던 대상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혹자는 시험관이 여자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원인이 부인 쪽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남편한테 미안할게 뭐 있냐고 한다. 당당해지라고 말한다. 둘이 같이 가고 있는 길이니 두 사람이 책임을 골고루 지라고 한다. 만난 적 없는 불특정 노인에게도 미안함을 느끼는 내가 그게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성격이고 당장 바뀌어지지 않는다.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듭 결과가 좋지 않아도 이제껏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여 온 남편이 처음으로 화색을 띠며 미래를 상상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 말이다. 학교 다닐 때쯤 되면 어느 동네(주로 학군 좋은 동네를 일컫는다)로 이사를 갈 것이며, 살면서 자식은 낳아야지 라며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떠올렸다. 주말이면 둘이 함께 하는 외식 자리에서 남편의 기뻐하는 상상을 들으며 나도 기뻤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 처음 봤다. 내가 낙담되어 있어도 덩달아 기분 다운되는 일도 없었고, 그저 덤덤하게 또 하자라는 말만 하던 사람이었다. 지난주에 확인한 단 한 가지 결과물을 보기 전까지 그랬다.


유산의 아픔을 겪고 원인이 태아 염색체 이상임을 알고 난 후 PGT 검사를 하기로 했다. 배아에 염색체 이상이 있는지 이식하기 전에 검사해 보는 과정인데 이걸 하기 위해서는 수정란이 체외에서 5일을 살아남아야 한다. 나이가 많은 여자일수록 체외수정란이 5일까지 버티기 힘들다. 우리는 이 검사를 하기 위해 어떤 차수에는 배아를 전부 버리기도 했고,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다 싶을 때는 3일 배양 상태로 냉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9개월 만에 어렵게 5일 배아를 얻었다. 검사를 보냈다. 티는 안 냈지만 남편은 뛸 뜻이 좋아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행복했다. 


그동안 검사도 보내보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 발 나아갔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며칠은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기뻤다. 며칠은..


조마조마하지나 말 걸. 매일 결과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내가 내 명에 못살지 한탄하기가 무색하게 비정상 배아로 판정되어 폐기 처리 하기로 했다. 어떤 염색체는 개수가 많고 어떤 염색체는 개수가 적다는 결과지를 받아 들고는 내 이름이 잘못 적혔길 바랐다. 내 결과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형편없이 추락한 성적표를 가지고 와서 엄마한테 내밀었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한없이 반항심을 느낄 때 엉망진창으로 나온 성적표를 보란 듯이 흔들며 공부 안 하겠다고 드러누워버리던 흑역사를. 그때 엄마 마음이 지금 내 감정과 같았을까. 할 수 있는 뒷바라지를 다 했는데도 아이 성적은 끝도 모르고 떨어져만 갈 때 느꼈던 엄마 심정일까 싶다. 


낮에는 휘청휘청이라도 간신히 몸을 가누었는데, 밤시간이 되니 센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임신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젊은 여자를 만나서 시험관을 한다면 남편은 바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되겠지라는 긍정적인 생각과 기대감으로 나랑 하나씩 해나가고 있을 텐데. 이번만큼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보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미안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지나가버린 창창했던 내 젊은 시절이. 상황이 달랐다면 일찍이 아이 낳는 선택을 했을 내 과거가. 나는 아이를 예뻐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이를 안 낳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힘내라고 그래야 다음에 또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별로 귀에 안 들어온다. 검사를 보내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이리되니 이건 이거대로 낙담스럽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 생각도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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