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 2009
어쩌면 나는 저승에 갔다가 돌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아이의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반짝이는 두 눈에 고인 눈물과 함께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아이를 만난 곳은 갈대 밭이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갈대밭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잔잔한 바람을 느끼면서 갈대의 비릿한 내음을 맡으며 흥얼거리고 있던 나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눈을 뜬 나는 내 앞에 한 소년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한 남자아이였다. 누굴까. 소년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참을 서있던 아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가자."
나는 소년의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내 손에 전해졌다. 그리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었을까, 설렘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왜 그 아이를 봤을 때 눈물이 차 올랐을까.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나는 그에게서 낯선 느낌이 전혀 없었다. 왜, 나는 그 아이가 낯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왜 하필 나였을까.
아이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아이와 함께 걸어가기 시작하자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느 동굴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앞에서 나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 또한 맑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려워.
마침내 한 마디를 내뱉자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잡고 있던 내 손을 그저 더 꼭 잡고는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동굴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앞을 보며 걸어가다가도 자꾸만 고개를 돌려 걸어 들어온 입구 쪽을 바라보곤 했다. 입구로 들어오던 노을빛이 점점 멀어질수록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노을빛이 들어오던 입구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 칠흑 같던 어둠 저 끝에서 하얀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늘한 동굴 속으로 찬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그 아이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하얀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소년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눈 앞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마침내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난, 네가 죽을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소년은 내 두 손을 붉은 끈으로 묶고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엔 수많은 문이 있었고 그 아이는 수 백개의 문들 중에서 하나를 열어 나와 함께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저 커다란 구멍이었다. 문에서 1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 있던 그것은 마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창 같았다. 발 밑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 눈 앞엔 쩍쩍 갈라진 대지가 절벽 아래까지 층층이 떠 있었다. 아이는 나를 어느새 절벽 앞 까지 데려갔고 그 앞에 위태롭게 서 있던 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소년은 그런 내 손목을 붙잡고는 내게 천천히 말했다.
"넌 그냥 이 자리에 서 있으면 돼. 스스로 몸을 던지는 건 힘든 일이니까. 네가 저 지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어느 순간 내가 널 뒤에서 밀어줄게."
왜인지 모르게 그 아이의 말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인데 왠지 두렵지가 않았다. 그저 나는 그 아이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그 아이의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 절벽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 소년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나, 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내 뒤에 서 있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절벽에서 물러나 뒤로 돌아섰고 소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 지평선을 쳐다보고 있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야."
소년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5살 때였어. 네가 나를 찾아왔었어, 오늘처럼.
"... 아니야."
아냐, 난 분명히 기억해. 널 기억해. 난 여기, 이 자리에서 떨어졌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년은 떨어지던 나를 향해 무슨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 말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넌 나를 왜, 다시 살려낸 거야? 왜 지금까지 살게 해 준거야? 그리고 넌, 왜 다시 날 찾아온 거니...?
아이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조금 멀어진 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꽤 긴 시간이 흘러간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건조한 바닥을 적셨다. 그는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묶여있는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쩌면 나는 소년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내 생을 마감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가가 붉어진 그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네가 무슨 말을 내게 전하려고 했는지, 지금 내게 말해 줄래?
내 말이 끝나자 소년은 다시 지평선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그 소녀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어쩌면 소년이 이 곳에서 사람들을 '또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하기 전에 사랑했던 소녀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사랑했던 소녀를 밀어서 죽였다고 말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의 대지에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쩍쩍 갈라져있던 대지 위에 새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고 그 위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자리로 데려오는 모습이야."
새하얀 도화지 같은 대지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있었고 그 끝에는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년과 소녀가 활짝 웃으며 하얀 대지 위에서 지평선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어줬는데... 날 만나서 저렇게 환한 모습으로 웃어 줬었는데..."
...
"그런데 난 저 아이를 밀어서 죽게 만들어 버렸어. 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서까지 날 향해 환하게 웃어줬었어."
소년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런 소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소년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슬픔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 소년은 나를 다시 절벽 앞으로 데려갔다. 대지는 하얗게 변해있었지만 여전히 내 발밑은 끝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그대로였다.
"절벽 저 밑엔 운명을 거르는 또 다른 시공간이 존재해. 넌 이미 15살 때 저 시공간에서 걸러져서 다시 네 세상으로 돌아갔을 뿐, 내가 널 살려낸 게 아니야. 네가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에 그곳에서 걸러져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구나.
"... 만일, 만일 이번에 네가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전해줄래? 곧, 내가 이 일을 마치면 따라갈 테니 날 만나면, 날 용서해달라고."
내가 15살 때 이 아이의 손을 잡고 이 자리에 섰을 때도 분명히 이 이야기를 내게 했을 것이다. 그 어린 소녀를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게 된다면 꼭 이 말을 전해달라며 떨어지는 내게 소리쳤으리라.
"꼭, 꼭 우리 다시 만나자고."
나는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 내 어깨 위에 놓여있던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꼭 전해줄게. 설사 이번에도 운명이 날 살리더라도 네 이야기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게, 다음에 네가 날 다시 찾아왔을 때 잊고 있지 않도록.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떨어졌다.
소년의 도움 없이,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몸을 던짐과 동시에 나는 그 꿈에서 깨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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