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4
오늘은 현지어 수업을 수강하는 학원에서 진행하는 현지 문화 체험의 날이었다. 학원을 빠져나오기 전에 학원 선생님은 오늘 하루 동안 케이블카를 타고 엘 알토에 올라가서 시장을 둘러보고 깔라꼬또까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오늘은 주황색 노선 케이블카를 빼고는 다 타볼 예정이라며 볼리비아 라파즈하면 단연 케이블카가 빠지면 안된다며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선생님의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우리는 함께 Teleférico(케이블카)를 타러 샌프란시스코 근처로 미니부스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가 탈 붉은색 케이블카는 샌프란시스코 성당 근처의 케이블카 정류장인 Central/ Taypi Uta와 Cementerio(납골당)를 연결한다. 특히 이 노선은 많은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노선이기도 하는데 Cementerio로 단숨에 가기 위해서, 혹은 Cementerio에서 El Alto(엘 알토 : 높은 지대)로 가기 위해서이다.
케이블카 비용인 3Bs을 내고 티켓을 구매한 후 케이블카에 올랐다.
하늘에서 보는 라파즈의 낮 풍경은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시야가 확트여 먼 산에 지어져 있는 붉은 집이 넘실넘실 파도치듯 보이기도 했고 푸른 하늘엔 새하얗고 커다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그 밑은 구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 동안 먼 곳만 바라보며 절로 나오는 감탄사를 연신 뱉어냈지만 엘 알토에 가까워지자 그제야 감탄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대가 낮은 Zona sur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많으며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반면 지대가 높은 엘 알토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가난하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이 지역엔 창문이 없는 집도 허다하다. 듣기로는 이런 집에 가난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산기슭에 개미집처럼 다닥다닥 붉은 집이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부산 감천문화마을 같은 느낌이지만 가까이 보면 예쁜 벽화는 그려져 있지 않고 오로지 슬픈 기운만 뿜어낸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던 나는 원주민들은 위쪽 지역으로 밀려난 것 같다는 동기의 말에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분명 몇 분전만 해도 한 없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절로 해대던 나였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저 슬프기만 했다.
엘 알토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16 de Julio 정류장 옆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라파즈의 풍경을 눈에 담고 사진을 찍었다. 동양인 여러 명이 EL ALTO라고 크게 설치되어있는 글씨 앞에서 사진을 찍으니 신기해 보였던지 많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했고 몇몇은 사진을 찍고는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후 조금 걸어가면 탈 수 있는 하늘색 노선을 타고 엘 알토 시장을 공중에서 탐험했다.
역시나 볼리비아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촐리타 아주머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현지어 선생님인 Sonia는 그 전통의상이 약 200~ 300Bs 까지 한다고 말했다. 한화로 치면 대략 4만 원 정도 한다는 것인데 가난한 삶에 비해 옷에 투자하는 비용은 너무 비싼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파란 하늘 아래, 멀리 보이는 Illimani(일리마니: 6462 m) 설산과 그보다 조금 낮은 Huayna Potosi(와이나 포토시: 6088m)의 풍경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엘 알토의 지평선 그리고 초록빛이 없는 라파스의 붉고 메마른 산과 의외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다 보면 엘 알토에는 붉은 벽돌집들 사이에 알록달록한 건물들도 볼 수 있는데 Sonia는 그것을 볼리비아 예술가와 한국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이런저런 볼거리가 많았지만 그래도 하늘색 노선의 케이블카가 너무 길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현지어 선생님은 이제 내려서 시장을 잠시 걸어보자고 했다. 어차피 깔라꼬또로 내려가는 초록색 노선을 타기 위해서는 엘 알토 시장을 가로질러 미니부스를 타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학원 선생님은 가방은 꼭 앞으로 메고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이곳은 동양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뿐더러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도 볼리비아에 오기 전에 도서관에 있는 '남미' 관련 책을 다 꺼내어 볼리비아 챕터만 다 읽어보았는데 하나같이 공통으로 적혀있던 것이 '소매치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소매치기를 하는 일도 허다하지만 대부분 3인에서 4인이 무리 지어 다니다가 타깃을 잡으면 그 타깃 옆으로 와서 침을 뱉거나 무언가를 쏟은 후 다른 사람은 뒤로 다가와서 닦아주는 척하며 가방을 가져가는 수법을 쓴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더 긴장하며 현지어 선생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더랬다.
시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은 말린 새끼 라마가 작은 가게에 여러 마리 걸려있던 것이다. 이 곳 인디오들은 예부터 전통적으로 Pacha mama(파차마마)라는 대지의 어머니께 제사를 지낼 때 말린 새끼 라마를 비롯하여 다양한 물건들 태우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 때문이리라.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현지어 선생님의 발걸음이 워낙에 빨랐기에 무언가를 사거나 하는 시간 없이 빠르게 걸어서 시장을 빠져나오기 바빴지만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엘 알토의 시장과 풍경을 체험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미니부스를 타고 초록색 노선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Calacoto(깔라꼬또)라는 지역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면서 느낀 건 확실히 엘 알토, 라파스의 센트로와 깔라꼬또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작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엘 알토와 높은 빌딩과 큰 건물들, 넓은 부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라파스의 센트로와 깔라꼬또... 서로 붙어있는 곳인데도 이렇게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니.. 눈으로도 보이는 엄청난 빈부의 차이였다. 초록색 노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엘 알토보다는 6~700미터 아래, 소포카치보다도 2~300미터 더 낮은 지대인 Zona sur(남쪽 지대, Calacoto와 Los pinos 등이 위치해있다.)의 넓은 부지에 개인 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분명 볼리비아인이라기보단 유럽이나 타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특히나 백인일 확률이.
사실 지난번 한국 대사관에서의 볼리비아 약사(略史) 강의를 받았을 때 볼리비아에서 볼리비아노, 즉 인디언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100년의 식민지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이들에게 약간의 노예근성이 아직 남아있다라고도 했다. 시키는 것만 하고 주체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주체가 되지 못한다고. 또한 이 곳에서는 '백인'이라는 이유로 대우를 받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산다는 말도 들었는데 정말 충격적이고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더랬다. 학원에서도 el piel(피부) 색깔에 대하여 clara(백인), oscura(흑인), normal(보통, 황인)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도 선생님은 이런 것들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백인과 흑인과 황인을 차별하고 있지 않은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을 하는 세상...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포카치에 있는 Fidalga라는 마트 2층에 위치한 푸드코트에 들러서 아시안 음식점인 Wok-ing에서 밥을 먹었다. 동기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어느 어린 꼬마 소녀가 동기 중 한 명에게 다가가서 무어라 조잘거렸다. 딱 보아도 길 위에서 살고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동기 단원이 미안해, 미안해, 안돼라는 말을 하자, 다른 동기 단원에게 갔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와서 무어라 조잘거렸다. 너무나도 작은 아이의 얼굴이 차고 건조한 공기 탓에 다 터있었고 며칠 씻지 못해 붉은 뺨에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나 또한 미안해,라고 이야기하자 금방 내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그리고 몇 분 뒤에 맞은편 입구에서 다리가 많이 불편한 한 여성이 계단을 힘겹게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왜인지 저 여자가 아까 그 아이의 엄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 테이블에 있던 남자에게 조잘거리던 아이가 이번에도 거절을 당하고 멀찌감치 자리를 찾아 앉아있는 그녀에게 달려가 지친 표정을 하곤 옆에 앉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그 누구도 본인이 원해서 각 국가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한국에 태어나서 나름대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저 아이는 왜, 이 곳에서, 몸이 불편한 엄마의 아이로 태어나 이방인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살고 있을까.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걸까.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10볼이라도 쥐어주고 보낼 걸. 내가 너무 야박했나, 그런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싶었으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