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외국에서 영화관을 들러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영어 듣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신기하게도 내 경우엔 말하기보다는 듣는 것을 더 잘하기 때문이라서인지 영어 대사의 95퍼센트는 이해할 수 있는 덕에 걱정과는 달리 나름 재미있게 관람하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듣는다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던 나의 소통의 방식 때문인진 몰라도 누군가로부터는 "한서는 참 말을 잘 들어주네, 고마워."라던지 하는 좋은(?) 말을 듣기도 했지만 혼자 조잘거리면서 떠들던 그들도 "이제는 네 얘기도 좀 해봐."라는 말로 본인들의 '비밀'을 밝혔으니 이젠 내 비밀을 알고 싶어 했다.
나에 대한 말을 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입을 열면 실언을 뱉곤 하는 사람들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좀 더 하고 말할 순 없나, 좀 더 좋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들을 봐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놈의 '생각을 엄청나게'해야 했고 누군가의 앞에서 내 의견을 말하기가 언젠가부터 그렇게 어려워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고 그러다 한 번쯤 내 의견을 말할 기회가 생기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숨이 가빠오는 등의 증상이 생겨났고 대중 앞에 서기가 두려워졌다.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다 보니 좋게 말하면 진중해졌지만 현실에선 그냥 말 못 하는 바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배운 것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는 것을, 즉 본인의 의견을 말하는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이다.
"한국인들은 말을 잘하지 않아. 너무 조용하고 진지해."
내 외국인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도 이 친구는 나를 대하기가 참 어려웠다고 한다. 말이 없으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당연히 언어를 못하니까 말을 하기가 어려웠지.라고 하자 그럴수록 더 말을 하려고 노력해야지, 라는 답이 돌아온다. 외국에서 언어를 배우고 있는 나는 언어가 두려워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내 의견을 말하기가 두려웠다. 이 곳에서도 혹시나 실언을 할까 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실언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닥치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참 많았으니 차라리 말을 삼키고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직 나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겪어온 사람들 중엔 '꼰대'라는 단어로 명명할 사람들이 많았다. 무조건 본인 말이 맞고 절대 상대의 의견을, 특히 그 상대방이 어리거나 여자이거나 한다면 더욱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내가 한국에 있을 땐 내 주변에 참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식인'이거나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인생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류의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내 의견을 묵살했다. 그래서 어차피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의견을 포기한 채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았고 언젠가는 내가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기가 귀찮다'라는 문장으로 합리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나는 그들에게 '수동적인 어린 여자 바보'가 되어있었다.
한국에서 떠나 온 이 곳,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미 '시'를 읽고 외우고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수업을 받는다. 그들의 발표는 꽤나 열정적이다. 사실 처음 그들을 봤을 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온 몸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발표하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웃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아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본인의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고 본인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그런 그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 즉 어른들과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자신 있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역시나 본인의 의견을 진지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것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문화이며 오히려 본인의 의견을 말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이 곳에서 그들과 살아내면서 이 친구들에게서 용기를 얻고 내 의견을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꽤,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최근엔 70명 앞에서 프레젠테이션까지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말했다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고 엄청난 발전이었다.
귀가 좋은 나는 이제 목소리를 내고 내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상대의 개성과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만 말만 하려고 하는 자들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의 의견 중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정도로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내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나는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혹시 당신이야말로 듣는 연습이 필요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