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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an 07. 2019

여행의 시작

2018년 12월 15일 <Day 1>



 라파스 터미널에서. 03:20 PM

 오후 4시 30분 버스를 타고 쿠스코로 향하기로 했다.


 집을 나선건 오후 1시 40분 즈음이었다.

나는 볼리비아 라파스의 남쪽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터미널이 있는 센트로 지역으로 가려면 조금 빨리 서두를 필요가 있었기에 일찍 나서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터미널로 가기 위해선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했고 너무 빨리 도착한다면 센트로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여행 계획을 찬찬히 되짚어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원래 집 앞에서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탈 수 있지만 오늘따라 버스가 많지 않았었기에 21번가까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걸어 내려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아저씨를 만난 것이다. 어디에 가냐는 질문에 터미널에 간다는 대답을 했다. 본인도 그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마침 잘 됐다는 말문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아저씨는 본인이 미국에서 일을 하고 지금은 퇴임을 했지만 미국과 볼리비아를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영어로는 말하는 거 싫어하지?'라고 물어보셨는데 사실 영어로 말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스페인어 모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영어가 입으로 나오지 않아서 말을 못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도 잘하진 않지만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고 이 언어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가 바로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해는 한다는 답을 할 뿐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본인과 함께 일을 하는, 그리고 잘 알고 있는 한국인들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들은 일도 열심히, 노는 것도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 아저씨 근처의 한국인들도 정말 전형적인 한국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8번가까지 걸어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터미널로 바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려고 했었는데 아저씨는 터미널로 바로 가는 버스는 많이 없으니 그냥 Plaza Murillo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바꿔 타라고 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바꿔 타는 것은 싫었지만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그러자고 하며 같이 버스를 탔다. 아저씨와 버스에서는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굳이 대화를 하진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아저씨는 내게 여행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먼저 내렸다. 그 이후에 나는 광장에서 내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방은 무겁지, 버스는 안 잡히지, 나도 모르게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저씨가 또 걸어왔다. 본인이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며 다른 곳을 가려고 하던 중에 택시를 타고 지나가다가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서있는 나를 보고 내렸단다.

 "미안해! 여긴 차가 많이 안 다녀. 근데 터미널은 여기서 가까운데 걸어가는 거 좋아한다면서? 걸어가는 건 어때?"

아까 만나서 8번가까지 걸어갈 때 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더니 저런 말이 돌아왔다. 내가 아무리 걷는 걸 좋아한다지만 어린아이 몸무게 만한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3600미터 고산지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걷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며 아저씨께 '이러다가 곧 죽을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하면서 웃어 보였다. 농담 같아 보였길 바라는 진담이었다.

아저씨는 길가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주었고 나는 무사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쪽 지역에서 터미널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2시간 정도였다. 하, 집을 빨리 나와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출발시간보다 빨리 도착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기에 원래 카페에 가려고 했던 계획을 접기로 했다. 미리 버스표를 구매하고 그냥 터미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아본 버스 회사들 중 적당한 금액이면서도 서비스가 괜찮을 것 같은 버스 회사인 Litoral이라는 회사의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Litoral 매표창구에서 160Bs(약 23,000원)에 쿠스코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던 중 발견한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그는 쿠스코까지 똑같은 버스회사로 180Bs(약 26,000원)로 갔다고 했는데. 왠지 돈을 번 느낌이었다.

버스를 예매하고도 1시간이 남았었기에 터미널 중앙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전광판을 통해 흘러나오는 TV쇼를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4시 즈음 매표소로 다시 돌아오라는 매표원의 말이 생각나서 3시 55분 즈음 매표소 앞으로 갔더니 '안녕! 10분만 더 기다려 줘!'라고 했다. 5분 빨리 갔을 뿐인데 10분이라니? 남미에서는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정말 1년 4개월을 살았어도 적응이 안된다. 저렇게 10분이라는 말은 20분이 될지 30분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니까. 그래도 '알겠어.'라고 말한 뒤 '진짜 10분 뒤에 다시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터미널 중앙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다가 10분 뒤에 다시 매표소로 갔다.

그 10분만 더 기다려줘!라는 것이 20분이 되었을 무렵, 매표원은 본인을 따라오라며 나를 버스가 서있는 곳으로 안내해줬다. 아직도 문이 열려있지 않은, 즉 떠날 준비가 되지 않은 버스 옆에서 또 10분을 기다렸을 무렵 같은 버스로 쿠스코를 가는 한국인 남성 두 분을 만났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멍하게 버스 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침 짐칸이 열리고 버스 문도 함께 열렸다. 버스는 오후 4시 30분 출발이랬다. 정각에 출발했으면 좋겠다.


Trans Salvador버스에서. 04:45 PM

버스는 오후 4시 40분이 조금 지나서 출발했다.

Litoral 버스회사의 Trans Salvador버스 3번 좌석에서.

의자의 오른쪽엔 버스에서 제공되는 물, 주스와 과자가, 왼쪽엔 버스에 오르기 전에 구입한 이온음료가 있다.

버스에서 오르고 잠시 후, 나는 터미널에 도착해서 터미널 이용료 2.5Bs(약 400원)을 내고 구매한 작은 티켓에 버스 직원으로부터 펀치 구멍을 받았다. 그리고 직원은 그와 동시에 Formularios(출입국신고서)를 내게 주었다. 이것을 볼리비아에서 페루로 이동할 때 국경지역에서 제출해야 한다. 공항에서 작성하는 서류와 같은 형식이었기에 작성하기엔 수월했으나 Nombre de la frontera (국경 이름)에서 막혀버렸다. 그래서 통로에 서 계시던 아저씨에게 여쭤보니 “데사과데로 라고 쓰면 돼.”라고 하셨다. 문제는 그 철자를 모르니 듣고서도 못 쓰겠다는 거다. 그래서 옆 자리에 앉아있던 커플에게 물어보고서야 그 철자가 ‘DESAGUADERO’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철자 난관(?)을 극복하고 서류를 다 작성한 후에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터미널에 정차되어 있는 버스였지만 차창 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터미널 직원들과 큰 여행가방을 메고 돌아다니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그제야 확, 와 닿았다. 떠나는구나. 드디어 시작이구나, 나의 첫 해외여행. 속이 몽글몽글, 간질간질거렸다.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두렵기도 했지만 기뻤다. 설레었다. 어떤 사람들을,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그렇게 14시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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