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서 Oct 11. 2016

아빠

2016-10-11



이 곳에서는 솔직할 수 있어서 좋다.

오롯이 나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지.


오늘도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겠다.


1.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것은 내가 쓴 이야기를 읽어온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도 나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다. 그만큼 나는 아버지, 우리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조금은 빠르게 영원한 이별을 알아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흰 도화지에 나 혼자서만 칼로 북 찢어진 도화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찢어진 도화지를 가진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놀림을 받을 것이고 그 도화지 위에는 내가 원하는 그림도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딱, 그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저런 모습이었다.


나는 초등생 1학년, 2학년 년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서 아무렇지가 않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 한 해를 잘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였다. 그러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복도로 불러 아버지에 대해서 여쭤보았고 그것은 내게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버지 돌아가셨니?"라는 물음을 한 순간이었다.

그 물음을, 들으면서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었던지... 담임 선생님도 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자 알겠다며 교실로 얼른 들여보냈고 어쩐지 그 날 이후로,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도 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해 어느 날 짓궂은 남자아이가 내게 했던 그 말이 어찌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가던지.

 "얘 아빠 없잖아."

그 순간 나는 교실 안에서 큰 소리로 울어버렸다.


초등학생 4학년,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그 해에도 전 해와 마찬가지로 담임 선생님은 내게 학기 초에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여쭤보셨다. 그때 나는 부쩍 눈물이 많아져 있던 터라 우물쭈물 입을 떼기도 전에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전 해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나를 교실로 들여보냈고 어쩐지 나를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터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순간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 것이 아닌가.

"부반장이면 부반장답게 행동 해."

"?"

황당했다. 이거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닌가. 점심시간이었고 다른 아이들도 다들 즐겁게 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많이 떠든 것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내 친구들이 더 심했다면 심했을 것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장도 떠들고 있었는데 부반장인 나에게 '답게'행동하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순간 선생님의 눈빛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애비없는 애가 다 그렇지, 뭐.'

피해망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부재는 내게 콤플렉스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정말 누구에게나 말을 해도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울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사건이 있었다. 4학년의 겨울방학이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선생님이 오픈된 책상에서 학생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굉장히 사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의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던 한 여자아이가 잘 놀고 있던 내게 다가오더니 불쌍한 눈빛으로 내 등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XX아, 힘들어하지 마."

갑작스러운 그 아이의 행동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나 하나도 안 힘든데? 왜 그래 갑자기? 그렇게 말했더니

"너 아버지 없잖아."

그렇게 전 교실에 있는 학생들이 내게 다가와서는 불쌍하다느니 괜찮냐느니 하는 갑작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내가 아버지 없는 아이임이 밝혀졌고 나는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히고 자존심이 바닥을 치면서 고개를 두 팔에 묻고 한 동안 쉼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학창 시절에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한 해가 바뀌면서 매 년 제출해야 했던 가족에 대한 보고서였다.

담임 선생님들이 내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매 년 초에 그것을 써서 제출해야 하는 것 덕분이었다. 사각형의 칸, 위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칸은 왜 항상 부와 모 가 프린팅 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가장 첫 번째 줄은 항상 비워둔 채로 제출하곤 했다. 언젠가 엄마는 그 보고서 한 장을 써 내려가면서 내게 '부 자리에 아빠 정보 쓸까?' 이렇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뭘, 굳이...'라고 하면서도 아빠에 대해서 써 놓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매 해 나는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갔고 '아버지 어떻게 되신 거니?', '아버지 돌아가셨니?'라는 물음을 마치 전쟁터에서 확인사살을 당하는 군인처럼 꼭 한 번씩은 들으면서 한 해를 시작했다.


그것이 계속되었다. 19살 까지.

알게 모르게 미묘한 선생님들의 차별도 겪었었고, 대놓고 차별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은 나를 불쌍한 아이라고 여기다가도 '애비없는 애가 그렇지, 뭐.'하는 눈빛을 가끔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이 싫고 무서워 아이처럼 행동하지 않으려 했고 엄마가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 욕먹지 않게'에 부합하려 노력했다.


2.

나의 언니들은 아빠의 얼굴과 행동, 태도, 어투를 기억한다. 하지만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나를 제일 좋아했다던 아빠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어렸고 지금의 나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키 큰 남자가 내 아빠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용 같은 존재이다, 나에게 아빠란. 엄마나 언니들의 말로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아빠는 나를 제일 좋아했다고 하지만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내 걸음걸이를 보고 아빠를 닮았다고 말하고, 내가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엄마는 내가 아빠와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빠가 어떤 모습으로 앉아있었는지, 어떻게 걷는지 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환상이 있지만, 그래서 더 환상적이지 않다.

엄마와 언니들은 항상 지쳐있고 아빠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으니까.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평범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동경한다.

나는 할머니가 두 명이다. 즉 아빠의 엄마가 두 명이라는 것이다. 큰 고모는 큰할머니의 딸이고, 아빠와 작은 고모는 작은 할머니의 아들, 딸이다.

여전히 동거인으로 호적에는 올라가지 못한 할머니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친 아들이 아닌 아빠의 삶이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두 할머니는 매일 싸웠고, 아빠는 그런 엄마'들' 사이에서 항상 눈치를 봤고,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종가의 3대 독자로서 농사일을 배워야만 했었다.

그런 아빠에게 시집 온 엄마는 온갖 잡일을 도맡았고, 그런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아빠는 매일 아침부터 술에 절어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속이 터졌을 테고 때문에 아빠와 거의 매일 말다툼을 했었다고 한다. 언니들은 그런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래, 정신적으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아왔었을까. 언니들은 얼마나 평범해지고 싶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내가 평범해지고 싶음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3.

어린아이는 부모의 행동을 보면서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하는 행동이나,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행동,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 등 부모의 행동이나 태도, 어투는 아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남자아이는 엄마를 닮은 사람이나 엄마를 이상형으로 두고, 여자 아이는 아빠를 닮은 사람이나 아빠를 이상형으로 둔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엄마 아빠가 함께 행복해하는 장면이 딱 하나 있다. 내가 유치원생 때 아빠와 엄마에게 내 손으로 직접 카드를 만들어서 처음으로 드렸던 그때. 두 사람은 나를 보며 활짝 웃었고 서로를 보면서도 활짝 웃어 보였다.

슬프게도 내 머릿속에는 아빠와의 행복한 추억이 그 장면밖에 없다. 그래서 아빠와의 추억이 없는 나는 아빠가 나의 이상형이 될 거리도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사랑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는 거의 매일 싸웠다고 했고 여전히 엄마는 아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더하여 엄마는 내가 항상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고, 더 나은 사람을 찾아보길 바라며 나는 또 그 말에 부합하려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본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보가 아니면 뭐인가. 마마걸도 아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이 두렵다. 시작도 전에 이별부터 준비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깝고 바보 같고 그렇다. 어쩌면 아빠가 나를 제일 사랑했다는 그 말이 지금의 내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를 사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니들은 이 말을 듣고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건 좋지 않다며 젊은 시절에 맘껏 사랑하고 맘껏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작부터가 힘든 나는,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아서 힘이 든다.


아빠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내게서 떠나보낼 사람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존재.
어쩌면 나는 아빠를 아직까지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나는. 


아빠를 놓아야만 나는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프면 쌀을 먹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