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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Apr 02. 2024

후지산 아래에서 집라인을

2024.01.23.

 하늘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파랬다. 400미터 길이의 현수교 너머로 후지산이 보였다.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산의 언저리로 기다란 구름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약간 긴장한 상태였다.

 우리는 미시마 스카이워크에 와 있었다. 일본에 오기 전부터 나름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 그러니까 ‘미시마 스카이워크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며 집라인을 타자!’고 했던 결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전까지 남편도 나도 집라인을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이 들어간 계기는 넷플릭스의 <미래일기2>라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시즌1을 워낙 재밌게 봤던 터라 시즌2도 기대를 잔뜩 하고 봤는데, 결과적으로 주요 인물들 간의 로맨스보다 이들의 첫 만남 장소였던 미시마 스카이워크의 풍광이 인상에 남았다. 카메라가 현수교의 전경을 비출 때 나는 다리 옆에서 집라인을 타고 허공을 가르는 사람들을 보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나도 저거 할래!


 “남연, 밑에 한 번 내려다볼래?”

 다리를 4분의 1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남편이 손가락으로 난간 너머 아래를 가리켰다. 나는 난간 밖으로 고개를 숙였다. 숲이 까마득한 구덩이 속에서 팔을 수없이 뻗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떨어지면 끔찍하게 죽겠구나.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어 황망히 고개를 쳐들었다. 다리 옆으로 집라인 줄 여러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오빠, 왜 집라인을 타는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일까?”

 “글쎄, 혹시 동절기에는 쉬기라도 하나. 잘 모르겠네.”

 남편의 대답에 절로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 그러면 안 되는데. 너무 아쉽다~”

 “그러게, 아쉬워 죽겠네.”

 남편이 씩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마치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에 자기도 동조한다는 듯이.  


 그러나 우리의 아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가 다리를 채 건너기 전에 저편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집라인을 타는 중이었다. 도착 지점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안전요원의 모습도 보였다. 꿀꺽.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음…….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타보고 싶긴 한데, 혼자는 별로 안 내키네.”

 “나도 타고 싶기는 한데……, 일단 매표소까지 가면서 생각해 보자.”

 이런, 내가 쫄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매표소는 기념품 숍 안에 있었다. 입구 앞에 서약서 양식이 일본어와 영어로 비치돼 있었다. 나는 서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하자!


 “멧챠 코와이-”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교육 영상을 시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내 말에 조금 전까지 곁에서 장비 착용을 도와줬던 직원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 나는 의아한 기분이었다. 그냥 예전에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던 대로 ‘너무 무섭다’라고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반응이 격하지? 남편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너 지금 존나 무서워라고 한 거야.”

 “아.”

 그제야 나는 웃으며 합장한 손을 코앞에서 내보이는 것으로 머쓱한 마음을 전했다. 그 직원은 영상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다가와서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파이팅!’이라고 외쳐주고 떠났다.


 그로부터 15분 뒤에 나는 남편과 나란히 집라인 손잡이를 잡고 출발선 앞에 섰다. 눈앞에 허공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무릎을 굽히면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애써 부여잡았다. 쓰리, 투, 원. 고! 으악!! 나는 괴성을 지르며 발을 뗐다.

 잠시 후 지면에 발을 붙였을 때는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에 눈을 감고 청룡열차를 처음 탔었던 때와 비슷했다. 비록 줄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 눈을 감진 않았지만 풍경을 즐길 여유 따위는 확실히 없었다. 어쨌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스릴,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다행히 왕복 티켓을 끊은 덕에 아직 기회가 한 번 남아 있었다. 두 번째로 출발선 앞에 서서 이번에야말로 장비에서 손을 떼고 허공을 가르는 기분을 제대로 즐겨보마 다짐했다.

 “어차피 타는 중에 사고가 나면 내가 손잡이를 잡고 있든 말든 매한가지잖아.”

 나는 남편을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안전요원이 다시 카운터를 외쳤다. 쓰리, 투, 원. 고! 나는 줄에 매달려 풍경을 눈에 담으며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하지만 도착지점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도저히 손잡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쫄보력, 혹은 생존 의지가 이 정도였다니, 새삼 놀라웠다.


 그러나 첫 경험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우리는 장비를 반납하자마자 현수교를 내달리게 됐다. 마지막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 해가 저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에 오늘의 감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어쨌거나 중요한건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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