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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Apr 15. 2024

덕후의 성지순례(feat. sekai no owari)

2024.01.27.

하늘은 파랗고 맑아서 바다를 향해 걸어가
조금 무서워도 괜찮아, 우린 이제 혼자가 아니야.
- Sekai no owari, RPG 중에서 -

 

 오토리이 역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갔다. 노래 가사처럼 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서 나는 한 손에 샛노란 봉투를 들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봉투 안에는 어젯밤 시부야의 타워 레코드에서 구입한 J-POP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의 데뷔 앨범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세카이노 오와리가 처음 밴드를 결성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Club Earth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세카이노 오와리라는 그룹 이름은 직역하면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밴드의 리더인 후카세의 개인적 서사가 반영돼 있다. 그는 10대 시절에 선천적인 ADHD와 학교폭력, 도피유학 실패, 기억 장애 등으로 거듭 좌절을 경험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폐쇄 병동에 갇혀 이제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절망한 순간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곁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이들을 더 이상 고통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바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Club Earth는 후카세가 병원에서 나와 학창시절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한 이후 멤버들과 함께 빚을 내어 마련한 전용 연습실 겸 라이브 클럽이었다.


 역에서 Club Earth로 가는 길은 잘 정돈된 주택가였다. 숙소가 있는 긴자나 혹은 시부야, 신주쿠와 같은 대도시의 번화함은 없었지만, 한산하고 깨끗한 골목에서 여유로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몇 블록을 더 지나자 직사각형 형태로 쭉 뻗은 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1월인데도 여전히 초록이 무성한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공원 산책로를 지나 길을 건너자 드디어 Club Earth의 검은색 간판이 눈에 띄었다. 연립주택처럼 보이는 베이지색 건물의 지하 1층이었다. 출입문 바로 안쪽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말이 보였다. 하지만 밴드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나는 타워레코드 봉투에서 시디를 꺼내 간판 앞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남편이 옆에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성덕이 된 걸 축하해!

club Earth 앞에서

 내가 세카이노 오와리의 음악을 접한 시기는 대략 3년 전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분석을 받으며 힘이 날 때마다 필사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일상을 겨우 지탱해나가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고작 일기 몇줄을 토해내듯이 적는 게 최선이었다.

 당시에 유튜브에서 세카이노 오와리의 ‘Bird man’이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가사에 큰 위안을 받았었다. 그때부터 이 밴드가 지난 10년 동안에 발표한 곡들을 하나씩 찾아서 들어보게 됐다. 거기에는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해온 여정이 꾸밈없이 담겨 있었다. 그 고민의 결이 나와 맞닿아 있어서 정서적 파장이 아주 잘 맞는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Club Earth에서 나와서 ‘쇼멘테이(笑麵亭)’이라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역시나 세카이노 오와리의 멤버들이 연습을 마치고 자주 찾았던 장소였다. 식당 이름이 ‘웃는 면’이라니, 분명히 맛집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상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대기석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들여다봤다. 블로그 사진에서 본 대로 위쪽 벽에 세카이노 오와리 멤버들이 남긴 사인들이 보였다. 예스! 나는 성지에 온 순례자였다.

 30여분 만에 대기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서 메인 메뉴인 ‘아부라 소바’와 맥주를 주문했다. 아부라 소바는 간장과 참기름으로 베이스를 한 중화면에 라유와 식초를 뿌려 비벼 먹는 면 요리다. 소바를 한입 먹고 맥주를 마시자 흐흐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약간 느끼하고 매콤하면서 인스턴트 라면처럼 자극적인 맛, 멤버들이 왜 연습을 마치고 이곳을 자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완전 술안주네! 남편도 내 의견에 동조했다.

 음식을 다 먹고 떠나기 전에 팬 카페에서 본 대로 사장님에게 요청해서 후카세가 직접 제작했다는 동네 지도를 건네받았다. 지도에는 우리가 거쳐 온 Club Earth와 공원, 쇼멘테이를 비롯해 지역 맛집과 그밖에 가 볼만한 장소들이 정감 가는 그림과 함께 소개돼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어느덧 이 낯선 동네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바로 팬심의 힘인가?

(좌)쇼멘테이 내부의 사인  (우)아부라 소바와 캔맥주
세카이노 오와리의 팬을 위한 동네 지도

Sekai no owari <Bird man>

https://youtube.com/watch?v=4GavZcdf9Ls&si=GfvG_DMPq5wvCZ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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