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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Apr 09. 2024

하루키, DUG, 담배냄새

2024.01.26.

 녹슨 철문을 열고 어두운 계단에 발을 들이자마자 켜켜이 묵은 담배 냄새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벽면 한쪽을 빼곡하게 채운 낡은 재즈 포스터와 우둘투둘한 벽돌 벽, 알루미늄 파이프, 색이 바랜 층계에서 시간의 겹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층계를 밟고 지하로 내려갔을 때 직원 한 명이 우리를 알아보고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흡연석과 금연석 중에 어디가 좋으세요?"

 "금연석이요."

 나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직원이 우리를 계단을 끼고 있는 오른쪽 공간으로 안내했다. 바 테이블은 계단 바로 왼쪽 건너편, 흡연석으로 구획된 공간에 놓여 있었다. 두 공간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고 나서 남편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 이게 의미가 있어?"

 "그니깐."

 나는 격하게 동조를 표하고 나서 굳이 팔을 들어 후드티 소매에 배인 냄새를 킁킁대며 확인했다. 그니깐. 이 정도면 바다에 스포이트로 겨우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느냐 마느냐 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통조림 용기에 담긴 정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퍼뜩 책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오빠, 나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어.“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데?”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으잉, 갑자기?"

 "이번에 여행 준비하면서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었거든. 거기에서 봤던 문장인데 여기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흐응. 남편은 팔짱을 끼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얼마 뒤에 주문한 커피 두 잔과 파운드 케이크가 나왔다.


 도쿄에 와서 보내는 사흘째 날이다. 우리는 신주쿠의 'DUG'에 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재즈 카페 겸 바'로 소설 '노르웨이의 숲'-사실 나에게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익숙하지만-에도 등장하는 장소라기에 도쿄까지 온 김에 한번 들려보기로 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대학생인 와타나베는 미도리와 함께 바로 여기 DUG에서 보드카 토닉을 마셨다.



 독일어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주쿠로 나가서 기노쿠니야 서점 뒤편 지하에 있는 'DUG'에 들어가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다.

 "난 가끔 여기 와. 낮에 술 마셔도 이상한 기분 안 드니까."

 "낮부터 그렇게 자주 마셔?"

 "가끔." 미도리는 달가닥 소리를 내며 잔에 남은 얼음을 흔들었다. "가끔 사는 게 괴로우면 여기 와서 보드카 토닉을 마셔."

 "사는 게 괴로워?"

 "가끔은. 나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잖아."

 "예를 들면 어떤 거?"

 "집안 일, 남자 친구 문제, 생리 불순, 여러 가지."

 "한잔 더 어때?"

 "물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



 이번에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미도리가 ‘가끔 사는 게 괴로우면 여기 와서 보드카 토닉을 마셔'라고 말한 대목에서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대사가 너무 중2병이잖아, 하고 말이다. 그 순간에 나는 미도리가 2년 전 뇌종양으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루과이에 가 있다고 했던 그녀의 아버지마저 실제로는 어머니와 동일한 병으로 입원중이라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웃음을 거두었다. 소설 속에서 미도리는 너무나도 씩씩하게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보드카 토닉 대신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스무 살 무렵의 기억을 회상했다. 대학 시절에 나는 과 친구와 함께 원룸에서 자취를 했었다. 문학을 제외하고는 수업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고, 과내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을 읽거나,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방에서 읽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가끔씩 코인 노래방에 가는 걸 즐겼다. 그 무렵에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었지만, 나는 상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적어도 의식 수준에서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르바이트도, 책읽기를 제외한 취미 활동도 도무지 남들처럼 꾸준히 해낼 수 없었다. 독서 모임에 나갔지만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 안에 어린 시절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자기 비난의 언어들과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늘상 잠복해 있었다. 너는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애야. 겨우 그런 걸 가지고 힘들다고 하는 거니? 언제나 쓸모 없는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 멍청한 년. 병신.

 사정이 이런데도 나는 그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네 잘못이라는 비난이 날아들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 나는 존재의 절반 정도가 죽어 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상념을 거두고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핸드폰으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네이버 기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남편은 나의 힘든 시기를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람이었다. 그 시간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됐다.  

 “뭘 보고 있어?”

 ”그냥, 기사들.“

 남편이 핸드폰을 보는 사이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게 내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젊은 연인과 친구, 혼자 온 청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DUG에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왠지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이만 일어날까?"

 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남편이 층계를 따라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행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나는 짧게 대답을 하고 이어 물었다. "여기 어땠어?"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마음에 들어. 너는?"

 "나도. 딱 하나, 담배 냄새만 빼고."

 "에이, 그래도 그걸 빼면 안 돼지. 오히려 담배 냄새가 여기만의 감성인데."

 듣고 보니, 아차 싶었다. 담배 냄새는 DUG가 지나온 세월을 간직한, 공간의 중요한 일부였던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쿰쿰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거리로 나와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우리는 저마다 죽음을 껴안은 채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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