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2.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었다. 시즈오카 역에서 전철을 타고 고텐바 역으로 갔다. 예약한 호텔이 고텐바 프리미엄 아울렛과 이웃해 있어서 역 앞에서 아울렛으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할 셈이었다.
역을 빠져나와 캐리어를 끌고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뒤편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페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Coffee LOVE IS ART. 이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데다가 흰색 페인트칠을 한 외관에서 세월의 흔적까지 느껴져 자연스레 발길이 이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의 바 테이블 안쪽에서 머리가 희끗한 여주인이 우리를 맞았다. 공간 전체를 빼곡하게 채운 액자와 오른쪽 벽면에 나란히 걸린 괘종시계들, 영사기가 이목을 끌었다. 액자의 내용물은 주로 누군가의 얼굴을 찍은 흑백사진이었고, 서예문구와 간혹 옛 신문기사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우리가 앉은 바 테이블 선반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 다양한 판본으로 진열돼 있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작가의 사진과 그의 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도 보였다.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사장님한테 지금 내 캐리어 안에도 같은 책이 들어 있다고 말해줘.”
소설 ‘설국’은 내가 이번 여행 일정에 니가타 지역을 포함시킨 이유였다. 시즈오카에서 우연히 들린 이 작은 카페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이에 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건지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설국을 읽었다고요?”
“하이, 분쇼가 키레이데스.” (=네,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여주인의 반색하는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미리 번역기를 돌려 찾아둔 짧은 일본어로 답했다. 그녀는 우리가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중간 중간 말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입가에 부처님처럼 은은한 미소를 띠고서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카페의 주인은 이케타니 슌이치라는 사진작가인데,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분인가 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기 가족사진을 부탁했을 만큼.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밑에서 촬영 보조로도 일했었다고 하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라고? 왠지 이름이 귀에 익어서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과연 대표작이 영화 ‘라쇼몽’이었다. 영화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인 ‘라쇼몽’과 ‘덤불 속’을 하나로 엮어서 재구성한 작품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신의 저서인 ‘자서전 비슷한 것’에서 ‘라쇼몽’의 주제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이 시나리오는 허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렸다. 아니, 죽어서까지 허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를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업이고, 인간의 구제하기 힘든 성질이며, 이기심이 펼치는 기괴한 이야기다.
한 마디로 인간 내면의 그림자를 비추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림자의 속성을 들여다보는 데는 빛이 필요하다. 그 빛에 명칭을 부여한다면, 바로 사랑이 아닐까?
가게 한쪽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포스터가 의미심장하게 붙어 있었다. 예술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일 거다. LOVE IS ART.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