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1.
우리의 첫 목적지는 시즈오카시 역사박물관이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조식을 먹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밤새 빗줄기는 한층 가늘어졌지만, 바람이 불어 날이 스산했다.
박물관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가는 동안에 이자카야 간판이 유독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도 일대가 유흥가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날밤의 취기가 가신 골목은 조명이 꺼진 놀이공원 같았다.
골목 끝에 이르자 4차선 도로 건너편으로 시즈오카 현청이 보였다. 박물관은 현청의 별관 건물 옆에 있었다. 1층에서 3층까지 전시를 둘러보는 데 대략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한국사 연구자인 남편은 일본어가 꽤 능숙한데다 역사 전반에 관심이 많아서 전시물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반면 내 경우에는 애초에 시즈오카시의 역사에 별반 호기심이 없었던 차에 언어의 장벽까지 더해져 집중력을 금세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에 우리는 1층에 있는 ‘허그 커피’에 들렸다. 허그 커피는 시즈오카에만 있는 로컬 카페였다. 시내에서 머무는 동안에 한 번은 들릴 생각이었는데, 마침 박물관에 입점해 있었던 것이다. 음료 두 잔을 주문하고,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창문 너머로 물길에 둘러싸인 슨푸성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슨푸’는 시즈오카의 옛 지명으로 원래 슨푸성의 주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새장 속에서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전국시대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생관을 비교한 이야기를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목을 친다. (오다 노부나가)
어떻게 해서든지 두견새를 울게 만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쿠가와 이에아스)
이들 셋 가운데서 전국시대부터 이어져온 혼란을 평정하고, 쇼군의 자리에 오른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러고 보니 역사박물관 2층 전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한 기념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만큼 지역 주민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낀다고 여겨졌다. 단지 그가 역사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점심은 시내에 있는 ‘놋케야’라는 식당에서 먹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운이 좋게도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둘 다 대표메뉴인 990엔짜리 ‘네기도로동(=참치회 덮밥)’을 주문했다. 밥 위에 잘게 다진 참치회와 수란이 얹어져 나왔다. 여기에 네기도로 간장을 뿌려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비벼 먹었다.
“너 정말 행복해 보여.”
남편이 (아마도)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냥 먹어도 좋은 간장계란밥에 참치회까지 넣었는데 맛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럴 수가! 분명히 식당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제법 보였었는데, 잠깐 사이에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거기에다 따사로운 햇살까지 비추다니. 와. 내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30분 뒤, 우리는 전철 안에 있었다. ‘미호노마츠바라’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곳 날씨가 좋아졌다고 해서 저쪽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므로 절반 정도는 도박이었다.
과연 여행 블로그에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기대와 불안 속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약 한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온통 덮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중에 하나인 미호노마츠바라(三保松原)의 지명은 미호 반도의 소나무 들판이라는 뜻이다. ‘신의 길’이라고 적힌 표지를 따라 안으로 얼마쯤 걸어가면 곧 400년이 넘은 소나무 3만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으로 길이 연결된다. 뾰족하게 뻗은 솔잎 사이사이에 빗방울이 이슬마냥 맺혀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쾌청한 기운이 느껴졌다. 양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역시, 숲은 언제나 옳아.”
나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숲길의 끝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희뿌연 구름 아래서 바다의 색채는 푸른색보다는 회색에 더 가까웠다. 수평선과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샌드위치에 낀 양상추처럼 아주 살짝 드러나 보였다. 후지산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거 완전히 데스 스트랜딩이잖아?”
남편의 한 마디에 나는 푸흣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데스 스트랜딩’은 남편이 최근 들어 다시 시작한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괴현상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거의 파괴된 세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마치 게임 속 한 장면을 재현하듯이 검은 모래를 밟으며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한창 걷는 도중에 노란 플라스틱 공이 들어 있는 나무통 하나를 발견했다. 누군가 공에 안경을 씌워 놓은 모양이 제법 익살스러웠다. 역시나, 멸망해가는 세계에도 위트는 존재하는 법이다.
마지막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남편과 얘기를 나눌 즈음, 돌연 사위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보니 하늘을 장막처럼 가리고 있던 구름이 어느새 뒤로 한층 물러나 있었다. 덕분에 수평선과 구름 사이에 공간이 넓어지면서, 후지산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한쪽 허리 부근이 겨우 보이는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아예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나는 감격하고 말았다. 오늘은 이정도로 충분했다. 떠나기 전에 바다와 후지산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숙소 근처에 있는 ‘토가쿠시 소바’라는 식당을 찾아 저녁 메뉴로 소바와 텐동 세트, 맥주를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 나니, 이만하면 하루를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박물관에서 나는 내내 전시실을 겉돌았고, 미호노마츠바라의 상황 역시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다만 그러다보니 좋은 순간의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미호노마츠바라에서 후지산의 일부를 잠시 봤을 때처럼 말이다.
두견새가 언제 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주어진 현실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오늘 보낸 하루가 내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잔을 부딪쳤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