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8.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에서-
우에노역에서 죠에쓰 신칸센을 타고 에치고 유자와역으로 향했다. 우리는 유자와시에 있는 료칸에서 이틀 밤을 묵을 예정이었다.
열차는 이제 막 목적지 전 역을 통과했다. 앞으로 십여 분 뒤면 군마현과 니가타현의 경계를 잇는 터널을 지나 설국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차창 밖을 주시했다.
터널은 생각했던 것만큼 길지 않았고, 단속적이었다. 게다가 풍경의 변화도 기대했던 것만큼 드라마틱하진 않아서 ‘설국’이라고 칭하기엔 표현이 과하다 싶었다. 설산 아래서 나지막한 지붕과 빌딩, 공장, 아스팔트 도로가 본연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거리 곳곳에 눈 무더기가 쌓여 있는 광경이 눈에 띄긴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우리가 료칸에 머무는 동안 눈이 잔뜩 내렸으면 좋겠어.”
나는 아쉬움을 한껏 담아서 남편에게 말했다.
잠시 후 열차가 에치고 유자와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역사를 빠져나왔을 때 거짓말처럼 공중에서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앞에 버스 정류장과 건물들, 그 너머로 설산이 성큼 가까워 보였다. 남편과 눈이 서로 마주쳤다. 이럴 때 필요한건? 바로 하이파이브였다.
우리는 숙소로 가기 위해 ‘(구)카이카케 온천’이라고 적힌 표지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료칸에서 송영버스가 마중 나오기로 약속돼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마을의 외곽을 지나쳐 산길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승객들 사이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설산과 설원, 사방이 온통 흰 눈뿐이었다.
바야흐로 설국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송영 버스로 갈아타고, 비탈길을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도로 양옆으로 눈이 거의 종아리 높이만큼 올라와 있었다. 그 위로 눈송이가 계속 쌓여갔다.
료칸 입구에 들어섰을 때 건장한 체격의 남자 직원이 의외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서 식당과 대욕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객실로 갔다.
방 안에는 트윈 침대와 TV, 전기 포트와 다기함, 원목 협탁이 놓여 있었다. 바닥은 적당히 따듯했다. 우리는 유카타로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협탁에 앉아서 녹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베란다로 향하는 여닫이 문 너머로 얇은 발과 눈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잠시 동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오기로 했다. 복도는 나무로 돼 있었고, 윤기가 반질반질 났다. 대욕장에 이르자 붉은색과 파란색 천으로 여탕과 남탕이 구분돼 있었다. 저녁 시간 이후에는 천의 위치가 바뀐다고 들었다. 내가 갔을 때는 운이 좋게도 마침 노천탕이 비어 있었다. 목 바로 아래까지 몸을 푹 담그고,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한참 동안 탕에 머물러 있었다. 혀를 잠깐 내밀어 눈의 결정을 맛보기도 했다. 몸은 덥고, 머리는 차가워서 정신이 아주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 남편을 기다리며, 다시 차 한 잔을 마셨다. 침대 끝에 앉아서 베란다 너머를 들여다봤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평온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나는 새하얀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