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 May 20. 2024

센다이의 밤(이자카야 ‘쵸쵸’에서)

2024.01.30.

 에치고 유자와역에서 조에쓰 신칸센을 타고 다시 도쿄까지 내려갔다가, 오미야역에서 도호쿠 신칸센으로 환승하여 센다이역까지 갔다. 워낙에 철도로 유명한 일본이니 만큼 두 지역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노선을 개통할 법도 한데, 굳이 비뚜름하게 브이 자를 그리며 우회하는 경로만 있는 까닭이 궁금했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지역이나 철도회사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다양한 추측이 가능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일 뿐, 진실은 저 너머에 있었다.

 센다이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 센다이는 일본 동북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다. 그에 걸맞게 역의 규모도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 주위로 대형 몰들이 몰려 있어 마치 성벽을 두른 것처럼 보였다.

 이곳 센다이에서 우리의 일정은 매우 단순했다. 하룻밤을 머무르면서 먹고, 또 먹는 것이었다. 본래 한국에서 숙소와 신칸센 티켓을 예매했을 때만 해도 시 외곽에 있는 ‘자오 여우마을’을 구경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눈밭을 유유자적 누비는 백여 마리의 여우들이라니! 그야말로 귀여움 한도 초과였다. 하지만 웬걸, 우리가 센다이에 도착하는 날이 하필 여우마을의 휴관일이었다. 여행을 사흘 앞둔 시점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센다이를 여행 일정에서 제외할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오빠는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어차피 가서 하룻밤만 묵을 건데 시내 구경이나 좀 하지 뭐. 이제 와서 예약을 변경하는 것도 번거롭잖아?”

 뭐, 사실 귀찮긴 하지. 나는 순순히 동의했다. 곧장 블로그에서 센다이 시내 여행을 검색해보니 쇼핑몰과 맛집에 관한 정보들이 줄지어 나왔다. 쇼핑몰 구경은 도쿄에서 실컷 했던 터라, 맛집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그렇게 블로그와 구글맵을 뒤져 이자카야 ‘쵸쵸’를 발견했다.


이자카야 ‘쵸쵸’

 저녁 7시. 쌀쌀한 바람을 뚫고, 우리는 예약한 시간에 맞춰 쵸쵸에 도착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간판을 찾지 못해서 건물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겨울철을 맞아 테라스 앞에 비닐 장막을 쳐둔 탓에 가게 외관이 가려졌던 것이다. 장막 안쪽으로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만이 보였다.  

 나중에서야 가게 앞 벤치에서 쵸쵸라고 적힌 나무 문패를 발견하고서 장막을 통과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 나는 어떤 곳을 방문하여 문을 열고 경계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안에 바깥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쵸쵸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우선은 문 바로 옆에 놓인 벽돌 화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장작더미 위에서 생산 꼬치 여러 개가 타닥 소리를 내며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랏샤이마세!”

 새롭게 등장한 손님을 반기는 남자 조리사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직원이 다가와서 예약을 확인한 뒤에 우리를 바 테이블의 빈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은 커다란 디귿자 형태로, 안쪽에서 조리사 세 명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중간 중간 손님과 친밀하게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가게 안에 외국인 손님은 우리가 유일해 보였다.

 괜히 왔나?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손글씨로 정성스레 흘려 쓴 글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꽤 한다는 남편조차도 옆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메뉴를 몇 개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그때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이 곁으로 와서 말을 붙였다. 직원의 센스가 고마웠지만, 한편에서는 불쑥 이런 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혹시 여기서 멋모르고 주문했다가 눈탱이 제대로 맞는 거 아니야?

 “사시미와 생선구이가 저희 가게의 인기 메뉴예요.”

 두 가지 모두 구글맵 후기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이 보였던 메뉴였다. 어차피 여행지에 왔으니 속는 것도 추억이 될 거라 여기고, 권유에 따르기로 했다. 사시미 절반 사이즈와 이름 모를 생선구이 두 개, 그리고 사이드 메뉴로 감자 샐러드를 시켰다. 당연히 알콜도 곁들여서.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메뉴를 기다리는 사이 테이블 안쪽에서 익살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마스터(로 보이는 사내)가 물었다.  

 “한국이요.”

 “오, 안녕하세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접시 위에 회가 두툼하게 썰려 나왔다.

 마스터가 경쾌하게 외쳤다.

 “디스 이즈 재패니즈 스타일!”

 나는 회 한입을 양념장에 찍어 먹고 즉시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맙소사. 입에 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엄청난 맛집이다!

 과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화로에 구운 생선-꽁치였다-도, 심지어는 양파 튀김을 올린 감자 샐러드마저 눈이 반짝 뜨일 만큼 훌륭한 맛이었다. 여기에 사과를 얇게 잘라서 띄운 매실 사와까지!

 하지만 그날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주먹밥이었다.

 사시미 접시를 거의 비워갈 때쯤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명란 주먹밥이 맛있게 보여 따라서 주문한 것이었다. 다만 마스터가 추천해준 대로 명란 없이 가장 기본 형태의 주먹밥을 먹어보기로 했다.

 주먹밥은 맨 마지막에 나왔다. 마스터가 2인용 솥에서 갓 지은 쌀밥을 우리에게 내보였다. 쌀알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이윽고 소금을 적당히 뿌려 잘 섞은 다음, 무려 맨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알을 뭉쳐 형태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장작에 김을 구워 접시에 밥과 곁들여 냈다.

 따끈한 주먹밥을 한입 베어 문 순간에, 나는 가장 단순한 재료로 극강의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순식간에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재패니즈 스타일 잘 배워 갑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스 이즈 사무라이! 땡큐!”

 마스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호탕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를 포함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만요.”

 계산을 마치고 장막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안쪽에서 처음 우리에게 메뉴를 추천해줬던 직원이 나와서 우리에게 사탕처럼 생긴 봉지를 건넸다. 겉면에 ‘바브’라고 적혀 있었다.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상호명을 검색해 보니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입욕제였다. 이 정도 센스를 가진 가게라면, 잘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음식점을 찾아서 여행을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아.”

 진심이었다. 오늘 쵸쵸에 들린 것만으로도 우리가 센다이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마성의 주먹밥과 그밖에 주문한 메뉴들
이전 09화 설원에 풀어낸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