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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Jun 03. 2024

옛 성터에서

2024.02.02.

 시즈오카, 도쿄, 니가타, 센다이를 거쳐 현재는 아키타 시내에 머무르고 있다. 여행 15일 차. 이 도시에서 맞이하는 사흘째 날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커튼을 열어 날씨부터 살폈다. 이런, 또 눈이잖아!

 아키타에 와서 첫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눈이 내렸다. 대개는 마뜩찮은 똥바람과 함께. 하루 중 몇 차례씩 밀가루 같은 눈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졌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며 거리를 흰 빛으로 덧씌워가는 것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면 눈송이가 거의 수평으로 날아들어서 우산을 써도 별 소용이 없었다.


 방안에서 눈발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왔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오늘의 행선지인 ‘아키타 성터’에 도착했다. 성의 동문(東門) 정도를 제외하면 건물의 주춧돌 정도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여서 안내판을 보고서야 겨우 원형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낮게 솟은 원기둥 위를 눈이 한 꺼풀 덮고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처연했다. 기둥 바깥으로 사철나무와 가지가 빈 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빈 가지 중에 일부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나무 자체가 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무의 엉뚱한 자리에서 연하고 말랑말랑한 새순이 돋아나기도 하겠지. 분명한 건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자리에 선 채로 상상 속에서 허공으로 나비 한 마리를 띄워 보냈다. 나비는 얇은 날개를 팔랑거리며 옛 성터의 기둥 주위를 맴돌다가 빈 가지 너머로 사라졌다. 그 잠깐의 몸짓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어쩐지 절박하고 무상해 보여서, 서글펐다.  


 유적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동문을 지나쳐 ‘아키타성 유적 역사자료관’에 들렸다. 남편이 전시관 입구에서 안내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고대에는 발해 사신단이 이곳에 오기도 했었대.”

 “오, 발해라니. 오랜만에 들어본다.”

 나는 남편의 눈동자가 빛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소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이 전시관은, 여행 첫날에 버스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갔던 일본어 간판을 단 건물 이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뭐,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전시관을 빠르게 한 바퀴 돌고 나서 빈 자리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마냥 기다리기에는 심심해서 핸드폰을 열어 메모를 끼적였다.


 공간의 의미는 개별적이다. 이곳 아키타 성은 발해 사신단에게 교역의 통로였다. 현대의 지역 주민들에게는 관광자원이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역사자료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계 수단이기도 하다. 남편에게는 직접 방문해서 눈으로 확인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 자료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나는 오늘 옛 성터에서 ‘자연’을 감각했다.


 전시관 내부가 그리 크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왔다. 역사자료관을 나섰을 때 다시 가루눈이 세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유적지에서 봤던 가지가 빈 나무들을 생각했다. 외부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저 한 그루의 나무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무는 겨울 한 철을 살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터였다.

 달려가서, 나무를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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