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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May 14. 2024

설원에 풀어낸 마음

2024.01.29.

 이튿날 아침에 느지막이 식당을 찾았다. 조식 메뉴로 쌀밥에 된장국, 개인 화로에 구워 먹는 이름 모를 생선과 유부, 밑반찬 몇 가지가 나왔다. 단정한 상차림에 어울리는 다소 심심하지만 건강한 맛. 과하지 않아서 아침 식사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다음 객실로 돌아가서, 유카타 위에 패딩 점퍼를 껴입고 로비로 나왔다. 신발장 가까이 갔을 때 곁에 서 있던 직원 한 명이 반대편을 가리키며 손님용 장화를 신고 가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눈길을 걷기에는 아무래도 운동화보다 고무장화가 훨씬 편할 거예요.”

 장화를 골라서 신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은 밤새 그친 모양이었다. 송영버스가 지나는 길과 주차장 부근을 제외하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눈에 박혔다.

 우리는 료칸 바깥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걷는 도중에 송영버스 두 대가 느릿느릿 올라와서 길 가장자리로 비켜서기를 반복했다. 유카타 끝자락이 물기에 젖었다.

 길 왼쪽으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위를 이름 모를 동물 한 마리가 조심조심 밟고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눈 위에 총총히 새겨진 발자국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어디까지 갈까?”

 남편이 물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저기, 다리 끝까지. 어때?”

 “좋아.”

 우리는 다리를 향해 걸었다.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즈음 뒤쪽 저만치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간격을 좁히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다리의 폭이 좁아서 도저히 옆으로 비켜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장화를 절벅거리며 다리가 끝나는 지점까지 내달렸다.

 우리가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차 안에서 노부부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다리를 통과해 지나갔다. 우리 역시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져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산책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각자의 시간이었다. 우선은 대욕장에 들려 몸을 씻었다. 탕에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머리 위에 수건을 얹어 보기도 했지만? 딱히 효용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챙겨 라운지에 갔다. 라운지라고 해봤자 복도 가장자리에 있는, 서가 한 칸과 테이블 두 개가 딸린 작은 공간이었다. 나는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트북 화면에 새 문서를 띄우고 두어 시간 정도 글을 끄적였다. 처음에는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적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서 그냥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감정들을 글로 옮겼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관해서. 마지막에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의 판단을 넘어 오직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고 썼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헷갈려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라운지에서 글을 쓰는 동안에 남편은 방안에서 소설책을 읽었다고 했다. 김영하의 ‘작별 인사’. 한국에서 가져온 소설책이었다. 나는 책을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지 않았던 터라 남편에게 내용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남편은 나에게 책에 대한 감상을 짧게 전했다.

 “역시 김영하 작가 다운 책이었어.“

 근사한 평이었다. ’아무개 작가 답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언젠가 내 책을 읽은 독자가 흡족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다시 식당으로 가서 가이세키 정식을 먹었다. 모듬회와 스키야키가 메인 메뉴로 어제와 동일한 구성이었다. 료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으므로 하이볼과 사케 샘플러를 곁들여 먹었다.

 “개인적으로 오늘이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가장 좋았어.”

 “어떤 점에서?”

 나는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로 남편을 향해 물었다.

 “음…….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모처럼 쉬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하긴, 시즈오카랑 도쿄에서는 계속 돌아다니기에 바빴으니까.”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0년 가까이 대학 강사로 일하면서 여러 지역을 다녔다. 최근들어 부쩍 지친 상태였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정해진 일정 없이 유유자적하게 보낸 오늘 하루가 그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백지 위에 소란한 마음의 소리를 풀어내려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곳에 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백을 받아들였다.

 식당 안은 떠들썩한 열기와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깥은 어두웠다. 바닥에 깔린 눈 위로 정적이 가만하게 세상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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