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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Apr 21. 2024

오직 한 남자를 향했던 열정의 기록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저자가 한 남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체험을 기록한 자전 소설이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이다. 사회‧도덕적으로 금기시되는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객관적 거리에서 당시 자신이 품었던 열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일 뿐이다. 마치 그녀가 소설의 첫 장에서 묘사한 포르노 영화 속 정사 장면처럼 적나라하게.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의 행위에 관한 도덕적 판단과 별개로, 감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필치에 매력을 느꼈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하는 단단함과 열정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작품 속에서 그녀가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남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관계의 주도권이 동등하지 않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 놓고, 함께 있는 동안은 차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다. 그녀는 평소에 남자가 보고 싶어도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할 수 없다. 남자에게 그녀는 우선순위가 아닌 것이다.

 그녀가 이런 제약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욕망’을 선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망 그 자체에 대한 탐닉. 남자는 그녀에게 단순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차를 몰아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는 3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때 문득 교통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곧 ‘내 삶이 여기서 끝나게 될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으면서 흥미롭게 여겼던 부분이다. 저자가 주석을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상상을 통해 자신이 행위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자신의 욕망이 운명에 대항할 만큼 큰지 그 정도를 측정해보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심이 일었다. 과연 그녀는 남자와의 관계에 따르는 여러 제약과 도덕적 금기가 없었어도 그를 똑같이 사랑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거기에서 오는 고통조차도 탐닉하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된 수순에 따라 결국 남자는 그녀가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인 덴마크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에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에 대하여. 물론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의 부재를 의식하며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런데 그녀가 글쓰기를 끝냈을 때 쯤 이라크와 서방 연합군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터지고 첫 번째 맞는 일요일 저녁에, 그녀는 헤어진 남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집에서 그와 재회한다. 그날 밤 그를 호텔까지 태워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제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거야’라고 다짐한다.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 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 내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 안에서 비로소 남자와 진짜 이별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책을 덮고 나서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 끝내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열정을 다 하는 마음은 사랑일까 상처일까? 어쩐지 그녀의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상처를 읽은 기분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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