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임신과 육아휴직
2개월 전 '나의 해방일지'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심리상담센터 첫번째 방문 후기를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담을 받으면 모든 것이 잘 풀려갈 거란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 항상 뒤통수를 친다.
난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상담의 주 내용은 회사 일이 아닌 아이에 대한 것이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말 그대로 멘탈이 붕괴되었다.
나는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안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가졌으면 참 좋았을텐데ㅠㅠ'
'난 지금 커리어를 쌓을 때인데ㅠㅠ 애 낳으면 복직 못하는 거 아닐까'
'돈을 좀 많이 모아놓을 걸...'
아쉬운 생각만 계속 머릿 속에 떠올랐다.
주변에서는 그저 축복이라며 다 어떻게든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사자인 나는 엄마라는 이름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눈물이 나서 많이 울었다.
그때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임신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조건이 다 갖춰지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커리어 관련해서도 육아하면서 목표를 세워두고 거기에 맞춰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으면 된다고 조언해주셨다.
무엇보다 일과 아이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고민할 거리가 아니라는 말이 가장 내 마음을 후벼팠다.
며칠이 지나니 어느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상황을 수긍할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짧은 사춘기를 마치고 출산 전까지 열심히 회사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한번 퇴사를 결심했던 회사를 다시 다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굳게 먹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황은 계속 나를 찾아왔고,
새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체력적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일을 벌리기가 무서웠다.
'왜 이것마저 내 의지대로 안 되는걸까'
차갑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왜 나는 힘들다고 징징대고 서 있는가 화가 났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나는 산전육아휴직과 존버 사이에서 또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쌤 : 산전육아휴직을 쓰고 아이 낳을 때까지 쉬는 건 어때요?
나 :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걸리고, 제가 집에서 쉬면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더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 무서워요
쌤 : 그럼 힘들더라도 휴직 전까지만 업무 조정해가면서 버텨보는 건 어때요?
나 : 임신해서 체력적으로 8시간 근무가 정말 너무 힘들어요ㅠㅠ
선생님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하는 표정이었다(ㅋㅋ)
그때는 내 맘을 그대로 답한 것이었는데 써놓고 보니 내가 봐도 상당히 골 때리는 답변이다......
체력이 안 돼 일을 못하면서, 방법은 찾아보려 하지 않은 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선생님은 이렇게 내가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결정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 하셨다.
처음에는 갸우뚱했다.
'나 일할 때 책임감 강한데, 내가 왜 책임감이 없다고 하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이 아닌, 내 삶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회사처럼 평가받는 일에만 책임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평가받을 기준이 있는 곳에서만 120% 동력을 발휘해 악착같이 내 임무를 완수해냈다.
성적으로 내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학교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온 에너지를 몽땅 쏟아 버리기에 나머지 주어진 내 역할에는 충실하지 못했고,
책임감 없이 크게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남들 눈에만 잘 평가받고 싶은 어린 아이, 부끄럽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모습은 MMPI-2 다면적 인성검사 결과에서도 드러났다.
다른 요소들에 비해 자율성이 눈에 띄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수치였는데 나는 100명 중 91등이었다.
학창시절 엄마는 나 대신 무엇이든 대신 해주고 결정해주었다. 엄마는 내게 다른 건 신경쓰지말고 공부만 잘 하라고 했다. 그래서 공부(=남에게 평가받는 일)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삶의 1순위 가치라고 믿었다. 그리고 엄마가 곁에 없는 지금까지도 그 평가받는 일에만 목숨을 걸며 스스로 잘 살아오고 있다고 믿었다.
선생님은 자율성을 기르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그에 다른 결과도 책임지고 싶었다.
임신 전부터 공황 발작 증상이 있고 거기에 입덧이 더해 체력 저하는 계속 되었기에 당연히 내 몸과 마음은 푹 쉬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직했을 때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1) 생활비 걱정 2) 커리어 단절 3) 사회활동 단절로 인한 고립감, 이 3가지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 하고 방전된 체력으로 하루하루 끌려가고 있었다.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선택하는 게 좋을지 집요하게 물어보며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나'와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미뤄두고 커리어에 대한 욕심만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직장인으로서의 나 외에는 존재 가치를 찾지 못한 사람의 당연한 생각회로일 것이다. 커리어가 없는 나는 곧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존재이기에 공황이 오고 온몸이 부서질듯이 아파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휴직해야 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하게 들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내 존재 가치를 찾는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라면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할 것이고 불행한 엄마가 될 것이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 아이가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내가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임을 체감하고 온전한 내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고 싶다. 그렇게 나는 임신 소식과 함께 곧 해방을 앞두고 있다. D-10...
다음 회차는 '엄마가 되는 것이 무서운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 특별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다섯 아이와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