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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05. 2024

[북클럽] 캠프를 탈출하는 방법

Ducks (Kate Beaton) 감상문

두께만큼이나 많은 것을 담은 책. 답답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낙담하는 복잡한 마음 끝에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한다. 알버타 경기는 오일앤가스에 달려 있다고. 정부에서 태양광 설치하라고 보조금을 주면서 재생에너지를 강조하는 지금도 여전히, 보란 듯이 아이러브오일앤가스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널렸다. 오일붐이 정점을 찍었던 2005-2008년, 그 본산인 포트맥머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2018년, 포트맥에 통역하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오일캠프에서 기간제로 일하다가 다친 사람이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통역하는 자리였다. 상담사도 통역사도 다른 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성사된 비싼 만남이었지만, 그 한 번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 그때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몇인데 이렇게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 한국어 통역사는 그렇다 쳐도, 심리상담사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회사가 우린 할 일을 다했다고 변명하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는 걸 이제는 알겠다.


걸핏하면 독립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알버타 사람들의 분노도 이해가 간다. 이렇게 고생해서 번 오일머니를 공평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퀘벡에 보내주고, 정작 퀘벡은 자기네 주민들에게 프랑스어만 배우면 일 안 해도 될 만큼 보조금을 주면서 종국에는 '알버타의 더러운 오일' 운운하며 비난을 퍼붓는다. 노바스코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또 어떤가? 바다를 낀 아름다운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이런 똥 같은 곳, 지긋지긋해,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 오로지 돈 때문에' 타령을 부른다.


케이티를 태웠던 택시 기사는 캠프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아무도 집으로 대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캠프의 정체성이다. 캠프를 차린 대기업에게 포트맥은 치고 빠지는 돈벌이 수단일 뿐 결코 집이 아니다. 집이 아니기 때문에 착취할 수 있을 때까지 착취하고, 씨를 말리고, 오리 500마리가 타르 늪에 빠져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되는 것만도 힘든데, 남초 사회에서 여성 소수자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도 만만치 않다. 그녀들의 이름이 케이티건 린제이건 베키건 세상에는 안전한 장소가 없고, 안전한 남자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은 오일캠프뿐 아니라 대학 기숙사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모두가 공유하는 상처가 됐다. 물론 캠프에도 여자들을 희롱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정상적인 남자 수백 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쓸데없이 여자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녀들의 일상은 쓰레기들로만 가득 차 버린다. 이 비인간화 역시도 캠프를 집으로 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캠프 남자들은 집 혹은 고향 땅에 있는 여자들과 달리, 캠프 여자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캠프 여자는 내키는 대로 막 대해도 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말이 통하는 백인 여자들도 이렇게 힘든데, 캠프 주변 원주민 여자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왜 수많은 원주민 여자들이 실종되고 살해당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슬프게도 바닥 아래에는 지하가 있다. 그런 남자들을 뜯어먹기 위해서 캠프 주변 타운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도 있고.


이 책 덕분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오일앤가스의 이면을 알게 됐다. 돈 때문에 캐나다 전역의 사람들이 모여서 캠프를 돌아가게 했고, 알버타를 부흥하게 했고, 죄를 지었다. 지금 여기 사는 나 역시 같이 짊어져야 하는 원죄.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캠프 노동자들과 은인이자 원수인 오일앤가스.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무고하며 결백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이 만든 시스템, 오일앤가스를 기반으로 한 부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결론은 복잡할 것도 없고, 정치적일 필요도 없다. 집으로 대하고,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내가 생활하는 혹은 방문하는 모든 공간을 집처럼 아끼고, 내 울타리 안에 있건 밖에 있건 사람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우리는 비인간화의 고리를 끊고 캠프를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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