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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Feb 19. 2017

감기

때로는 격렬하게 앓도록 하자




감기에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자고 일어나 밥먹고, 약먹고, 코 풀고, 재채기하고, 핸드폰 속 깨알같은 글씨로 세계 각국의 동정과 연예계 소식을 읽다가, 다른 쪽으로 누워자는 일을 반복했다. 좁디좁은 내방과 뜨뜻한 침대가 세상의 전부인 이틀이었다.




아파서 출근을 하지 않은 건, 내 기억이 맞다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회사생활 중에 처음인 일이다(라섹수술하느라 병가를 낸 적은 있지만서도). 딱히 건강하거나 성실해서라기보단 출근한 후 회사에서 앓거나, 아파서 늦게 출근하거나, 아파서 일찍 퇴근하거나 했던 것 같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결근하는 것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학교에 결석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었다. "우리 애가 아파서.." 하는 엄마의 통화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잠들면 되었던 어린시절과 달리, 직접 회사에 전화를 하고, 동료에게 휴가 결재를 대신 부탁하고, 오늘 처리했어야 할 내 몫의 업무를 걱정하고, 내 책상서랍은 열쇠로 잘 잠그고 나왔는지 긴가민가 걱정하며 잠드는 일이었다.

어렴풋이, 새삼 나의 어른됨을 실감했다.




내가 드러눕는 걸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은 다소 놀란 것 같았다. 죽을 끓여주고, 그 죽이 얼른 식기 전에 먹으라 채근하고, 약을 지어와주고, 그 약을 얼른 먹으라 채근하고, 수다를 겸한 괴롭힘을 자제하고(여동생 얘기다), 물을 많이 먹으라며 문자로까지 당부하고('비타민' 애청자인 건강박사 아빠 얘기다), 추운데 머리를 감는다고 혼내고, 어제보단 얼굴이 나아보인다며 안심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과외 선생님이 말해준 일화가 떠올랐다. 어릴적에 건물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는데, 온가족이 간호하고 보살펴주는 동안의 사랑받는 느낌 때문에 오히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평소의 나보다 허약하고 무력해져 있을 때, 요청하지 않아도 따뜻한 물처럼 고여드는 관심과 염려.

나는 그만 우습게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져버렸다.




실컷 앓고 또 쉬고 나니 없던 기운이 슬그머니 생기는 것 같았다. 앓은지 이틀째 되던 밤, 평소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옷정리를 하고, 내다팔려고 쌓아뒀던 책들을 드디어 온라인 중고서적에 처분했다. 그러고도 뭔가 아쉬워 아직 열감이 가시지 않은 몸으로 집밖을 나섰다.



동네 국밥집에서 벌건 얼굴로 홀로 앉아 호로록 국밥을 먹고, 집 앞 카페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을 사 들고 돌아왔다. 잠깐의 외출에도 온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이틀동안 지겨웠던 내 방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새삼 안도하며, 침대안에 숨어들었다.


책을 읽으려고 펼쳤지만 많이 읽지는 못했다.
다만 이상하게 충만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 개운한 몸으로 기지개를 켤 내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아프지 말자.

다만 어쩔수 없이 아파야 할 때는,

다 놓아버리고 격렬히 앓도록 하자.




- 2017. 2. 19. 2:3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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