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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Mar 02. 2017

저울

기울어진 것들에 대하여



1.
여고시절(이라고 쓰니 왠지 BGM으로 쎄씨봉의 음악을 깔아야만 할 것 같지만), 학교친구이자 동네친구이자 같은 독서실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연애도 스스로를 꾸미기도 잘 하던 그녀는 명문이자 동문인 이웃 남고에 동갑내기 남자친구를 두고 있었다. 그녀의 싸이월드가 핑크색 맨투맨 커플티 같은 것들로 채워질 무렵, 내 기억이 맞다면 사귄지 200일 즈음, 그녀가 고민이 있다며 내게 말했다.
고비인 것 같아. 더 이상 안 좋아하는 것 같아.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늦은 밤, 친구의 집 옥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말들을 들어주었다. 아마도 더이상 그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 혹은 좋아하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것들이었을 거다. 친구는 한동안 한숨을 쉬다가 글썽이다가 했었던 것 같다. 고3이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모의고사 성적을 더 중시해야 하는 직업이었고, 우리는 아직 이별에 익숙치 않은 않은 나이었다.



그때부터 연애상담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어린 머리를 굴려 서툰 조언들을 늘어놓았다. 나름 성심성의껏, 짐짓 슬픈 맘으로 많은 말들을 했던 것 같은데, 모든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말만은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있을 그애도 참 힘들겠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자만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마음 깊숙히 슬프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야, 사랑받는 것도 힘들어."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금도 가끔,
받아들여지지 않을 사랑을 하고 있는,
혹은 받고싶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기울어진 저울에 마음을 올려둔 사람들을 볼 때면
깜깜한 옥상에서 훌쩍이는 친구를 위로하던 그 밤이 떠오른다.



2.
관계의 저울이 항상 수평이었으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한때는 수평이었으나 어느샌가 천천히 기울었거나, 처음부터 수평인 적 없었던 관계를,

우리는 자주 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짝사랑일 텐데,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일인지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숨겨보려 꾹꾹 눌러담아도 별 수 없이 삐져나오는 앙금같은 마음들, 아 넘나 달콤하고 안타까운 것.


짝사랑만큼 강렬하고도 허무한 감정이 이 세상에 또 있다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3.
한때는 맞사랑이었지만 점점 짝사랑이 되어가는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을 감지하는 이는, 마치 가라앉는 섬 위에 사는 원주민처럼, 가라앉는 관계를 속절없이 쳐다보거나 애써 외면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날 마침내

차가운 물 같은 이별을 맞게 된다.

가라앉는 섬 위에서 더이상 뭘 할 수 있었겠는가.



4.
짝사랑이든, 짝사랑이 되어가는 맞사랑이든,

마음을 주는 쪽만 꼭 괴롭다곤 할 수 없을 거다.
거절당하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상대방이 주는 마음을 거절해야 하는 괴로움 역시 어떨 때는 꽤 묵직할 때가 있겠지.


그 괴로움은, 상대방이 지극히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거나, 그의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서 나의 거절로 말미암아 적지 않게 아플 것임이 예상될 때 더욱 증폭된다.


나는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들만이 생기고 흐르고 또 변할 뿐인데.

어느새 미안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5.
사랑이 가지는 불평등의 속성은 세상 모든 술자리의 가장 맛있는 안주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를 친구 혹은 지인으로 지켜보는 것은 대체로 안타까운 일이어서, 어떨 때는 복면을 쓴 골목대장 같은 목소리로 "야 니가 뭐가 아쉬워서! 때려쳐 때려쳐!" 샤우팅해 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물론 육성으로 외친 적은 잘 없다.


마음속에 들어온 누군가를, 때려서 치워 버린다는 게, 그리 말만큼 쉬울 리가 있나.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10년 전 그날처럼 별 수 없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6.
오늘도 그가 일으킨 미세한 진동에도 5.8의 지진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며 저울의 각도가 조금이라도 기울었나 주시하는 그대여, 고생이 많다.


그거 원래 되게 힘들고 서글픈 거라고, 내 어린 친구가 그랬다.




7.
이러한 속앓이 없이 공평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 느끼는 이들은,

그 평화와 포만감을 기꺼이 즐기시길.

그리고 감사하시길!




- 2017. 3. 2. 10:34PM






+) 혹시 본인이 내 글의 주인공이라 생각된다면 조용히 아는척 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맞는지 알려줬음 좋겠다. 글 소재 값으로 동네에서 맥주 한잔 사겠다. 하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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