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드북>
재치 있는 대사와 감동적인 메시지, 귓가에 맴도는 음악의 3박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레드북>이 돌아왔다. 1894년 빅토리아 시대,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는 '한 남자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뿐이었다. <레드북>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성’이라는 분류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고자 노력하며,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던 안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우리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뮤지컬의 첫 번째 넘버는 많은 경우 관객에게 하나의 이정표로 기능한다. 그 노랫말에 주인공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즉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우리의 안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난 뭐지, 난 뭐지
나도 아직 모르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나를 알고 싶어, 난 뭐지
M1. 난 뭐지 - 안나, 브라운, 시민들
그녀는 왜 이런 고민을 하는 걸까? 기본적으로 안나는 꾸밈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된 상황을 보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솔직하게 그 마음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안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친구였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주 나쁜 년이라며 비난하기에 바쁘다. 똑같은 마음에서 행동해도 달리 평가받는 세상 속에서, 때로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당하며 안나는 자신이 누구일지 고민한다.
할머니의 유언으로 자신을 찾아온 브라운에게 영문 모를 응원을 받은 안나는, 다시 한번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던 중 우연히 도서관에서 로렐라이를 만나게 된다. 여자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말에, 제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던 바이올렛을 떠올리고 글쓰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주제는 자신이 가장 즐겨 하는 것으로 고른다. 슬퍼질 때면 야한 상상을 한다는 안나.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첫사랑 올빼미와의 추억을 글로 옮겨적기 시작한다.
당연히 안나의 소설이 담긴 책 <레드북>은 출판과 동시에 뜨거운 화젯거리가 된다. 여성이 글을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정숙하기는커녕 자신의 신체 부위나 구체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내용에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그 소설을 읽기 바쁘다. 물론, 당당하고 솔직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M22.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 안나
그러다 재판에 끌려가게 된 안나. 그녀가 재판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신경쇠약이나 정신질환을 주장하는 것뿐이지만, 안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또 자신의 글에 응원을 보내던 독자들을 부정하는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가치를 찾아낸 안나는 그렇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외친다.
안나가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녀를 둘러싼 연대다.
연대 連帶
1. 명사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명사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표준국어대사전준국어대사전
사실 연대에는 모순적인 속성이 있다. 여럿이 함께 모여 하나로 연결되더라도, 모든 사람이 완전히 동일한 목표를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더라도 그 의도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안나와 함께 <레드북>을 출간한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 그렇다. 이들을 모은 공동의 가치는 '글 쓰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그에 대한 지지다. 하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로렐라이 언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안나가 재판에서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할 때, 같은 문학회로서 함께 재판받게 된 로렐라이와 도로시는 정신질환을 주장하는 데 동의한다. 자신들의 글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라 거짓말로 인정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그 위험천만하고 도발적인 글을 함께 쓰고 출판까지 한 사람들이, 왜 그 글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로렐라이는 '로렐라이 언덕'을 지키는 것이 삶의 1순위 목표다. 자신이 이름을 따서 살아가고 있는, 과거에 사랑했던 여인 '로렐라이'의 뜻을 따라, 여성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책보다는 문학회 활동 자체가 더 중요하다.
도로시에게는 소중한 아들 '토토'가 있다. 항상 인형을 들고 다니며, 그게 아들인 것처럼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해주던 도로시는, 여성으로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토토가 중요하다. 글을 쓴다는 이유로 이혼당해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하지만, 만약 구금되어 버린다면 더 이상 토토를 만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들은 로렐라이 언덕을 지키기 위해, 토토와 만날 수 없는 상황을 피하고자 부당한 처사에도 잘못을 빌기로 한다.
도로시 미안해요. 우리는 인정하기로 했어요. 정신적으로 미숙했다, 실수였다, 뭐든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줄 거예요.
로렐라이 순순히 인정해야 우리 로렐라이 언덕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도로시 난 우리 토토 꼭 다시 만나야 돼요.
(중략)
안나 미안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도로시 아니에요, 안나. 안나가 아니라 이 세상이 잘못된 거고, 우린 재수가 없는 거예요. 그치, 토토?
로렐라이 안나는 안나한테 가장 중요한 걸 선택해요. 그러면 돼요.
하지만 이들의 선택을 안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둘도,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고자 하는 안나를 응원한다. 어떻게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서로를 배신자라고 느끼지 않는 걸까? 이들의 연대는 느슨하다. 각자의 목표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을 존중한다.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기 때문일 테다. 나의 것이 너무 소중해서, 남에게도 그만큼 소중한 무언가를 존중해주는 것. 나는 이것을 우리 시대에 필요한 느슨한 연대라고 말하고 싶다.
다른 이들과 힘을 합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오직 하나의 이유만 존재하고, 방법 또한 하나만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한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고, 저마다의 이유로 함께한다. 차별받는 이들은 사실 다를 것 없이 동등한 이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개개인이다. 뮤지컬 <레드북>은 결국 공존을 위해 이해해야만 하는 같음과 다름의 역설을 전한다.
한편, 시대를 가로지르는 느슨한 연대의 초월적인 면모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안나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 그려지는 이야기지만, 그녀의 앞에는 또 다른 여성들의 노력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진짜 로렐라이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를 사랑한 남성이 '로렐라이'의 이름으로 그녀의 뜻을 이어왔고, 그 덕분에 안나는 동료들의 지지 아래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들의 연대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로렐라이와 안나가 건네준 변화의 불씨를 이제는 우리가 넘겨받은 셈이다.
안나에게는 사실 한 가지 소망이 더 있었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세상
나만 혼자 다른 세상
나는 정말 모르겠어
내가 뭐가 문제인지
언젠가는 알게 될까
어딘가엔 있을 거야
날 이해해 줄, 알아봐 줄 한 사람
M1. 난 뭐지 - 안나, 브라운, 시민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만약 이해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완전히 동일한 감각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면,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는 사실상 추측이다. 그 사람은 이럴 거야- 라는 배려에 기반한, 하지만 그 답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추측 말이다.
대부분 스스로의 경험과 감정을 기반으로 이 추측을 하게 된다. 문제는 너무 다른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다. 도무지 어떤 마음인지 가늠조차 안 될 경우에는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안나처럼 기존의 잣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해할 수 없으니 배척하고 미워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처음에는 안나의 파격적인 행보에 불쾌함을 표하던 신사 브라운이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몰라요
왜 수염이 자라고, 왜 나이를 먹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맘에 들어요
나는 저 별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몰라요
왜 빛나고 있는지,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겐 너무 아름다워요
당신도 그래요 내게는 그래요
이해할 수 없어도 좋아할 수 있어요
설명할 수 없어도 당신이 좋아요
M18. 당신도 그래요 - 브라운, 안나
이해는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귀기울이며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끝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더라도 괜찮다. 사랑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브라운의 사랑은 안나가 먼저 스스로를 긍정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해, 괜찮아, 이젠
M22.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 안나
연인이 된 뒤에도 안나와 브라운의 마찰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는데, 재판을 앞두고 일어났다. 하지만 안나는 이해받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꿨다. "나는 나로서 충분해"라고 확신을 가지고 선언함으로써, 브라운이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할만한 여지를 만들었다. 이해받지 않을 용기가 오히려 사랑받을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잘못된 것, 혹은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옳은 것에 지지를 표하는 건 어렵다. 후자는 자칫하면 다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룩진 세상에 오답으로 남을 용기를 보일 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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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연대와 이해라는, 흥미로운 결론에 닿는다. 가장 개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가장 사회적인 포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두 같은 인간이기에 모두 달라질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을 무겁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내는 뮤지컬 <레드북>은 12월 7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되며, 이후 두 달에 걸쳐 지방 공연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