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약국 가는 길. 벚꽃 흩날린 자리에 초록 잎 돋는다.
나이 드니 병이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얼마 전까지 팔이 아파 움직이지 못했고 며칠 전에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약사가 권한 푸리덴 원고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라일락 향기에 어젯밤 꿈이 되살아난다. 오래 전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였다. 조그마한 텔레비전을 둘러싸고 앉아 함께 월드컵을 보던 사람들 대부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때의 풍경을 되살린 것은 통증이 아니었을까. 그 때도 이랬었다.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지만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부위가 아팠을 때 헤모렉스 연고를 사와 발라주던 사람이 있었다. 싫은 내색 없이 걱정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지만 그 때도 봄이었다.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가르치려 들었지만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삶은 아름다웠다. 비록 홍차에 적신 향기처럼 고상하지는 않지만, 치질 연고 따위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래도 좋다. 봄바람이 기억 속 페이지를 펼쳐주었다. 아름다운 문장이 그곳에 있었다.
멀어져간 사람은 있어도 사라진 기억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일과 사람을 만나는 일이 다르지 않다. 세상이라는 도서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한 권의 책처럼 서로를 읽는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다가 시간이 다하면 보내주어야 한다. 어디에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한 소중히 다루다 다시 세상에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건 이야기뿐이다.
사람을 한 권의 책처럼 대하려 한다. 그가 품은 서사를 존중하고 하나뿐일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려 한다. 소유할 수 없으니 향유하려 한다. 사람을 가질 순 없어도 추억은 간직된다. 사람은 떠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영혼에 새긴 이야기는 언제든 펼쳐 볼 수 있다. 아무리 읽어도 닳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살아있는 동안 밤을 밝히는 빛이 되고 겨울을 견딜 온기가 된다. 사람이 읽어야 할 것은 사람뿐이다. 저마다 이야기라면 나의 삶도 그러하겠지. 사람이 책이라면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여기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어떤 일을 겪었건 그것은 나라는 이야기를 위해 필요했던 문장이었다.
뒤꿈치 조금 까져도 걷기 힘들고 손톱에 가시 하나 박혀도 끙끙 앓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하지 않은 부분이 없듯이 이게 뭔가 싶은 순간도, 이해하기 힘든 순간도, 아무것도 아닌 기분이 드는 때도 삶을 이루는 문장이 된다. 문장은 얽히고 꼬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수천의 문장과 수만의 단어들을 온전히 품었기에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을 잃는 게 아니라 추억을 남기는 거다. 인연을 잃는 게 아니라 삶을 쌓아가는 거다. 시간을 내어주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다. 시간을 지불하고 자신의 삶을 사는 거다. 잃어버린 시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잃어버린 것만이 다시는 잃을 수 없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