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로 여행하기

by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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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뉴욕에 반하다> <낭만 칠레> <당신이 캐나다에 꼭 가야하는 이유> <취리히를 맛보다> <스웨덴 스케치> <로마 걷기 여행> 같은 제목을 보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하고 미국 대륙을 횡단한 기록을 읽는다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서가를 가득 채운 그냥 ○○○, 무작정 ○○○, 어쩌다 ○○○, 인문학과 함께 ○○○ 같은 제목들은 자기 증식이라도 하는 걸까. 먹방을 본다고 배가 부르지 않듯이 여행기를 본다고 설레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타인의 ‘단순한 여행’ (물론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겠으나)에 관심이 생길 리 없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마 평생 갈 일 없는 장소에 가서, 지겨운 성장 스토리를 늘어놓는 걸 볼 바에야 소설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낫다. 사진으로 가득한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글보다 사진이 많은 책은 상상의 기쁨을 봉인한다. 차라리 영상을 보고 말지. 문장이 그러하듯이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사진인 걸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여행기가 많았다. 재채기하듯 던진 문장 몇 줄과 사진이 전부인 여행기는 나의 취향이 아니다. 좋고 나쁨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쌀국수에 들어간 ‘고수’처럼 단순히 입맛의 문제일 뿐이다. 여행지의 정보만 나열한 책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몰랐던 장소를 소개하는 여행기보다 내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기 쪽이 끌린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이 최고의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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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자주 가진 않았지만 책을 펼치면 세계가 밀려들었다. 내게 소설은 밥이었고 수필은 술이었다. 시는 이따금 먹지 않으면 안 될 약이었다. 자기계발서가 굳이 먹고 싶지 않은 ‘고수’라면 본격적인 여행기는 겨울이면 이따금 생각나는 굴이다. 일 년에 몇 점 맛보면 충분한 그런 종류의 음식이다. 여행기는 굉장히 넓은 세계를 다루지만 매우 좁은 독자층을 지닌 분야가 아닐까. 만약 그곳에 관심이 없다면 이름 모를 작가의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읽어줄 독자는 많지 않을 거다. 내가 스코틀랜드에 가서 마신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오키나와에 가서 라후테와 고야 찬푸루에 전통주 아와모리를 마시고, 니기타 노천탕에 앉아 사케를 마신다고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거다. 하루키처럼 유명한 작가가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먼 북소리> <도대체 라오스에 뭐가 있는데요> <위스키 성지 여행> 같은 책은 화제가 된다. 허영만 화백처럼 ‘식객’으로 인정받은 이가 쓴 <이토록 맛있는 일본이라면> 같은 책은 가서 먹고 마시기만 해도 여행서 분야 1위를 한다. 여행지의 특별함보다 여행자의 특별함에 끌린다. 여행지의 특이한 풍경보다 장소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에 끌린다. 유럽의 고성보다 문장의 아름다움에 반한다. 절벽의 높이보다 사색의 깊이에 감탄한다. 그가 찍은 사진보다 그에게 박힌 가시에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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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멋진 여행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전기장판 위에 배를 깔고 책을 펼치는 순간 시작된다. 타인의 여행에 한눈을 팔 새가 없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남미에 가보라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요시모토 바나나의 <불륜과 남미>를 읽겠다. 내게 여행의 풍경은 책을 읽다 고개를 들 때마다 보이는 터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남아공의 아름다움을 설명해봤자 소용없다. 책을 펼칠 때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데 여행에 목말라 할까. 어딜 가도 책을 읽을 텐데 그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일까. 여행기를 즐겨 읽지 않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글쓰기를 시작한 후로 ‘여행기는 치트키’란 걸 알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상황은 배경이 된다. 출발하는 상황부터, 이동하는 경로, 여행지에서 마주한 사람 이야기, 낯선 장소에서 겪은 일까지 서사가 된다. 행동과 대화. 풍경이나 묘사까지 쓸 거리는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떠나기로 했다(기),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승), 여행지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 (전), 돌아오는 길 이러한 느낌이 들었다(결). 완벽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으니 책 한 권은 뚝딱 나온다. 거기에 사진까지 덧붙이면 거의 해킹 수준 아닐까. 그래서 진입장벽이 낮지만 웬만하면 사람을 감동시키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검색만 하면 세계 곳곳의 사진과 동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매력적인 여행기란 장소의 특별함이 아닌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의 신선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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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통영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간 사람이 쓴 책이 있기에 반가움에 집어 들었다. 작가는 내가 가는 도서관에도 가고 우리 동네 해안로에서 러닝도 하고 그런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의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여행의 장면이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삶이 여행임을 깨달은 순간 바람은 내게 계절을 데리고 왔다. 매일 아침 나는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다. 한 번도 같았던 구름이 없고 다시 마주한 파도가 없다. 마흔을 앞두고서야 비행기를 처음 탔지만 불만 없다. 제주도를 왕복한 짧은 비행이 이번 생애 마지막 여행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지구별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다 생명이 스러진 후에는 별의 일부가 되겠지. 그전까지 부지런히 책을 읽고 햇살을 마주하고 세상의 일부를 뜯어 먹으리라. 그것이 나의 여행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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