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이스 잼잼
방금 <오므라이스 잼잼>을 읽었다. 한 끼라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마인드가 유쾌하다. 가족의 단란한 추억과 버무려진 맛깔난 이야기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그가 그린 음식은 어떤 사진보다 매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먹고 싶어지진 않았다. 먹방이니 쿡방이니 하는 영상을 봐도 딱히 입맛이 돌지 않는다. 타인이 먹는 음식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싶다. 다만 활자로 옮겨진 음식은 예외였다. 책 속에 차려진 매혹적인 요리들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외국 음식이라고 해봤자 짜장면이나 돈까스가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컴퓨터가 있는 집도 드물었다. 늘 배가 고팠지만 먹을 게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동전 몇 개로 갱엿이나 생라면을 사먹어도 돌아서면 허기를 느꼈다. 삼시세끼 차려먹는 것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꽃과 열매를 따 먹었다. 말리려고 늘어놓은 고구마를 주워 먹었다. 감나무에서 떨어진 뒤에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샤프심이나 잉크, 지우개에 개구리 알까지 먹고 다녔다. 그 때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상상의 힘뿐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을 먹어치우는’ 장면에 압도되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버터를 바른 따끈한 빵과 갓 짠 우유’는 마치 하나님의 음식 같았다. 빵 한 덩이를 훔쳐 감옥에 갇힌 장발장이 호밀빵과 양고기, 신선한 치즈와 무화과에 와인을 대접 받는 장면에 침을 줄줄 흘렸다. 양고기는커녕 양을 본 적도 없었다. 가끔 엄마가 공장에서 가져온 새참용 빵을 맛보았을 뿐이다. 흑빵이라는 단어는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 단순히 까만 빵이 아니라 ‘흑빵’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였다. 속이 꽉 찬 돼지고기 파이는 무슨 맛일까. 표류하는 선원들이 먹는 딱딱한 비스킷과 육포조차 맛있어 보였다. 돼지처럼 뇌조 구이를 먹어치우고 크바스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이프로 이를 쑤시는 호쾌한 러시아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다.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 먹는 뜨끈뜨끈한 양배추 스프는 또 무슨 맛일까. 부드럽고 달콤한 간사이식 돼지고기 생강구이를 우적우적 씹다가 흰쌀밥을 볼이 미어터지도록 밀어 넣고 싶었다. 간장을 넣고 구운 주먹밥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미소 시루 훌훌 마시면 꿀꺽 넘어가겠지. 전쟁터에 돌아가기 전날 먹는 호텔에서의 저녁 식사는 어떤 느낌일까. 진을 절반 넣고 로즈사의 라임주스 반을 넣고 아무것도 섞지 않은 진짜 김릿은 어떤 맛일까. 토끼고기 스튜는 무슨 맛이고 브로고뉴식 달팽이 요리는 어떤 맛일까. 소금에 절인 대구는 어떻게 먹는 걸까. 가스파초와 키리탄포 찬푸루는 어떤 음식일까. 오차즈케는 보리차에 밥 말아 먹는 거랑 다른 건가. 타마린드 소스를 곁들인 벨푸리는 뭘까. 추수 감사절에 먹는다는 칠면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새일까. 무협지에 나오는 음식들도 궁금했다. 절세무공을 닦고 내려온 주인공이 시키는 화려한 요리들. 회과육이나 궁보계정, 오향장육, 산라탕 같은 것들. 동정호에서 잡은 잉어 튀김이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지. 싸구려 화주 한 병을 시켜놓은 적막한 분위기는 또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남루한 행색에 무시하는 점소이에게 던지는 금전 하나, 시비거는 명문 대파의 제자를 단숨에 제압하는 클리세도 즐거웠다. 나를 홀린 음식들은 책 속에 있었다. 아무리 비중이 적은 등장인물이라도 음식을 먹는 순간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바득바득 이를 갈게 만드는 악당일지언정 요리를 먹어치우는 동안 존재의 당위성을 획득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에게만 허락된 행위다. 산 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살아있음의 증명이었다. 책 속 음식에는 상상을 현실로 데려오는 힘은 물론 현실을 환상적인 무언가로 전환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 책 속 음식을 맛보아도 실망만 늘어날 뿐이었다. 오코노미야키는 밀가루 맛이 났고 라멘은 내 입맛에는 싱거웠다. 콘비프에 옥수수가 들어가지 않는다니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책 속 음식들은 디즈니랜드처럼 환상의 세계였다. 추억의 맛이 예전의 맛이 아닌 것처럼 책 속에 있을 때에만 온전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좋은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도 궁금해 하고 상상하는 것도 책을 읽는 행위와 닮아있지 않은가. 책 속 음식은 꼭 델리만주 같다. 냄새는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매혹적인데 막상 먹어보면 보통인 그런 맛. 상상은 잠시 치워두고 내 앞의 한 끼에 집중해야지. 젓가락질이 능숙해져도 매 끼니가 처음이듯 산다는 것에 익숙해졌을 뿐 매일이 새로운 날이니까. 지금 역시 다시 맛보지 못할 순간이니까.
밥 한 숟갈 떠 넣기 버거울 때면 여기까지 나를 데려온 무수한 한 끼를 떠올린다. 지금까지 먹은 끼니는 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주었거나 스스로 벌어낸 밥이었다. 밥은 어머니의 한숨이었고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누군가의 애정이었고 누군가의 기쁨이었다. 내게 밥 먹이기를 즐거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눈치 보며 삼킨 밥도 나를 자라게 했다. 울며 넘긴 밥으로 마음을 길렀다. 꾸역꾸역 밀어 넣은 밥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잠들어 깨어나지 않길 바란 밤이 지나도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배고픔은 서러움일 때가 많았지만 서럽게 넘긴 밥에도 삶을 내일로 밀어내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한 끼를 넘길 때마다 삶은 조금씩 나아갔다. 한 치도 자라지 못하는 내게 실망한 밤에도, 제자리에서 맴도는 일상에 지친 아침에도 나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던 때에도 삶은 지속을 갈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한 끼를 이어 여기까지 왔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건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잃어버려도 세상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매 순간 나는 살아있었다. 죽음을 생각한 순간조차 몸은 삶을 갈구했다.
오늘도 거룩한 한 끼를 넘긴다. 살아있던 것을 넘겨 삶을 이어간다. 살아있었던 것의 몸을 제물로 바친다. 나물 한 줄기, 생선 한 토막, 고기 한 점마다 생명이 깃들어 있다. 라면 한 봉지에도 삶의 열망이 끓어오르고 마른 빵 한 조각에도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담대한 용기가 머문다.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내일을 희망하지 않는 자는 먹지 않는다. 먹기를 거부한 자는 오늘에 이르지 못한다. 한 끼에 깃든 거룩함을 아는 이는 온전한 오늘을 산다. 온전한 오늘을 사는 이는 기쁨을 미루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그리움도 세상을 맛보는 방식임을 안다. 웃으며 먹은 밥은 기쁨이 되고 눈물로 삼킨 밥도 생명이 된다. 오늘도 한 끼를 먹는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음에 감사하며 그릇을 씻는다. 도시락을 열듯 하루를 산다. 모든 끼니가 나를 살아본 적 없는 시간으로 데려갈 연료가 될 테니까. 이것저것 쌓아올려 정체성을 상실한 수제 햄버거처럼 살지 않겠다. 거친 빵에 치즈 한 조각이라도 온전히 집중하려 한다. 먹음직스럽지 않아도 좋다. 풍요롭지 않아도 괜찮다. 내게 주어진 한 끼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인생은 B와 D 사이의 초콜릿. 지금 맛보지 않으면 사라질 기쁨이 여기에. 아직 맛보지 못한 달콤함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