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 읽음

프롤로그

by 김민


여전히 설레게 하는 하나.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지금껏 살게 해준 단 하나. 내가 읽었던 책이다. 사랑으로 바꿔 읽어도 되리라. 책은 도망칠 수 있는 장소였고 고해를 건너는 다리였다. 발 디딜 틈이었으며 내게 말 걸어주는 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나의 세상이었다. 삶이 밀어내도 책은 있었다. 사람들이 떠나도 이야기는 남았다. 삶에 박힌 작은 가시를 뽑아 이 책을 썼다. 이것은 언제나 나를 비춰주었던 빛에 대한 이야기다.

내 삶에도 책을 읽을 정도의 빛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독서에세이를 써야만 했다.

동아리 활동은커녕 동호회 모임 한번 나가본 적 없다. 피규어건 클래식이건, 애니메이션이건 오토바이건, 낚시건 상관없으니 열렬한 애호가가 되고 싶었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서 몰랐을 뿐 나도 덕질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그쪽 세상의 주민이었다. 무림에 발을 딛던 날이 있었다. 미스터리에 미쳐 있던 밤이 있었다. 역사 소설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철학서를 탐독하던 시기가 있었다. SF에 빠져 우주를 헤엄치던 계절이 있었다. 이야기에 대한 허기가 나의 삶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배가 고파서 서가 사이를 헤맸다.

버스에서 읽었고 기차에서 읽었다. 공원에서 읽고 술집에서도 읽었다. 먹으면서 읽고 마시면서 읽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읽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읽었다. 평생에 걸친 덕질이었다. 시작은 도망칠 장소였지만 결국 내가 살아갈 세상이 되었다. 어디라도 책이 있으면 그곳이 나의 집이었고 어떤 일을 겪어도 책을 읽을 시간만 있으면 견딜 만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으면 어때서. 사랑하는 작가들이 있었고 나와 함께 숨 쉬는 인물들이 있었다. 제제와 함께 울었다. 노틸러스호를 타고 심해를 누볐다. 에르큘 포와로와 초콜릿을 마시고 셜록 홈즈와 함께 사건을 해결했다. 섀클턴과 남극을 탐험했다. 수업 한번 진지하게 들은 적 없는 건방진 학생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내게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혼자 책으로 배우는 편이 성미에 맞는 까닭이었다. 책으로 역사를 배웠고 철학을 배웠다. 노자와 장자, 에피쿠로스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나의 스승이었다. 마더 테레사에게 사랑을 배웠다. 법정스님이 삶을 가르쳐 주었다. 엘리자베스 쿼블러 로스에게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하루키 코치를 따라 뛰었고 김훈 선생님에게 자전거로 여행하는 법을 배웠다. 최인호 훈장님과 함께 유림의 숲을 걸었다. 평생에 친구는 하나면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게 무수한 친구들이 있어서였다. 마흔이 될 때까지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었으나 아쉽지 않았던 건 우주의 끝까지 여행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만의 월드, 시리즈를 계속해왔다. 내가 사랑했던 작가들은 모두 나의 세계였다. 그들이 써내려간 이야기가 나의 여행이었다. 그곳에 책이 있기에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내가 사랑한 인물들이 있다. 그곳에 여전히 그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긴자의 뒷골목에서 이젤론 요새로, 필립 말로와 김렛을 마시다 터미너스 행성으로, 베이커가에서 점심을 먹고 두 개의 달이 떠있는 세계로,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따라 초원으로. 어떤 일을 겪었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괜찮았다. 아무리 소란한 장소라도 책을 펼치면 이야기 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디라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근사한 장소였다. 무수한 이야기를 읽으며 삶이 이야기임을 받아들였다. 모두의 삶이 하나뿐인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내게 다가온 인연들도 이야기였다. 세상은 모든 존재가 어우러져 써나가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에 그치거나 인용으로 범벅된 책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일단 독서에세이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알맹이는 책의 세계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깨달은 이야기를 모은 견문록에 가깝다. 이야기의 힘으로 버텨낸 삶의 기록이며 이야기의 기쁨을 나누려는 몸짓이다. 생이 하나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이 된 한 인간의 고백이다. 이야기의 바다를 헤엄치며 본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을 수는 없지만 책에서 발견한 반짝임은 남김없이 담으려 애썼다.


오래전 읽었던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을 책을 펼쳤다. 그 때 느꼈던 환희가 되살아났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독서를 정리하는 것은 나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삶은 한시도 녹록치 않았지만 적어도 책을 읽을 정도의 빛은 비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낸 모든 순간이 밑줄 그어진 문장임을 알겠다. 내가 읽어 온 책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내가 써내려 온 순간들이 반드시 쓰여야만 했던 이야기임을 안다. 흐린 날도 힘든 날도 나의 날씨는 읽음이었다. 춥고 어두운 날에도 언제나 푸름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하루를 보냈건 잠시 나를 위해 책을 펼칠 여유만 있다면 근사한 삶이 아닐까. 오늘 읽을 책이 있고 내일 먹을 쌀이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이야기의 바다를 가능한 오래 헤엄치고 싶다. 오늘도 하루 종일 활자와 씨름하다가 책을 펼쳐든다. 왠지 우스워지지만 어쩌겠는가.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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