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시인에게

by 김민


집에 있던 시집을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 건지. 아니면 여행 중에 서점에서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는 까닭이겠지요. 어쨌든 2003년 여름 내내 당신이 쓴 문장은 은빛 동전처럼 반짝였으니까요. 기차 안에서, 비 내리는 정동진에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당신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 때 읽었던 문장은 맑은 소리를 내며 마음속으로 굴러들어 갔습니다. 문장은 십 원짜리 동전처럼 쓸모를 찾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떤 문장은 그런 방식으로 읽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문장은 삶을 놓고 싶어질 때마다 꺼내놓는 동전 한 줌이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쌓인 문장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당신의 책은 배를 갈라 따끈한 밥을 차려주었습니다.

당신이 남긴 불빛은 저의 어둠을 밝혀주진 못했지만 밤을 버틸 온기였습니다. 당신의 문장은 주머니 속 먼지까지 털어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꺼내 보는 편지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떠돌던 때로부터 12년이 흘렀습니다. 당신 말대로 뜨겁게 사랑하다 죽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마음을 다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상실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온갖 일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사람이 두렵고 거리를 걷는 게 무서웠습니다. 삶에 대한 욕구는 물론 안전에 대한 욕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싫었지만 깨뜨릴 용기조차 없었습니다. 거울 속 나를 마주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냈습니다. 하룻밤 새 자란 그리움과 하루만큼 깊어진 절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죽을 이유는 충분했지만 살아갈 핑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 산산조각이란 시의 구절은 삶을 붙드는 주문이었습니다. 낮에는 당신의 문장을 되뇌고 밤에는 성모상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룸비니에서 온 부처님은 나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차라리 새처럼 자유롭게 살리라 다짐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조차 되지 못한 주제에 새가 되려 했습니다.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리라. 마음먹은 날이 있었습니다. 향기로운 말 한 마디 품지 못하면서 꽃이 되려 했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다가오는 것들을 힘껏 껴안고 사라지는 것들에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를 버렸습니다. 버린 나를 쌓아 집을 지었습니다. 나를 지웠습니다. 지운 나를 뿌려 길을 이었습니다. 상실이 나를 증명합니다. 실패만이 나를 증거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꿈꾼 것이 나의 생이 될 것입니다. 부서진 것에는 부서진 것의 의미가 있고 사라진 것에는 사라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남겨진 것에는 남겨진 까닭이 있을 겁니다. 부서진 마음에도 바람은 불고, 봄비가 오고, 새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부서진 채로 살아도 괜찮더군요.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니 마침내 편안해지더군요. 유실물 센터는 잃어버린 것들이 모이는 장소지만 누구도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는 장소더군요. 상실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독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뿐인 등불을 들고 가버린 사람이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겨울에만 피는 꽃이 있듯이 상처 입은 손으로만 만질 수 있는 깨달음이 있더군요. 연꽃은 진흙탕이 아니면 필 수 없지만 그곳을 꽃이 핀 장소로 정의해버리더군요. 그를 사랑했던 자리에 삶이 피었습니다. 너를 잃어버리고 나를 놓아버린 곳에서 삶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막다른 골목은 없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은 스스로 길이 되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살고 싶어서 유서를 썼습니다. 유서는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문장이었습니다.


모처럼 당신의 시집을 읽습니다. 죽어도 좋을 봄볕입니다. 살아야 할 봄빛입니다. 보랏빛 꽃을 피운 로즈마리를 쓰다듬으며 당신의 시 ‘꽃다발’을 읊조립니다. 당신의 시가 새겨진 지구 위를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가슴 속에 시 한 줄 들어있지 않은 삶은 없겠죠. 단지 그것을 펼쳐드는 밤이 없을 뿐이죠. 누군가 대신 써줄 수는 있어도 누구도 대신 읽어 줄 수 없는 마음이 기다리고 있겠죠. 당신의 시집 24페이지에 나의 오늘이 머무릅니다. 마음 머무를 글귀 한 줄만 있어도 좋은 책입니다. 마음 머물렀던 사람 하나만 있어도 괜찮았던 인생입니다. 두고두고 외울 글은 길이 되고 부르지 못할 이름은 시가 됩니다. 그를 위해 속을 드러내 바친 날이 있었고 나를 위해 속을 보여주는 책이 있으니 제법 근사한 인생입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않겠습니다. 외로움을 품고 살겠습니다. 이따금 마음껏 울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눈물을 잃은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다. 엉망진창이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산산조각 났기에 삶은 반짝거립니다. 안녕과 안녕 사이에 사랑이란 단어조차 말하지 않으렵니다. 각자의 계절이 모여 세상이 되기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벼려졌기에. 눈앞의 풍경을 껴안기만 하겠습니다. 내 앞의 풍경을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프리지아 꽃다발이 걸려있던 집은 폐가가 되었고 소년은 중년이 되었지만 마음에 핀 꽃은 지지 않았습니다. 노래는 늙지 않으니까요. 허락 없이 핀 꽃도 아름답고 강은 뜻대로 흐르지 않아 근사하니까요. 도망칠 공간이 없으면 삶이 싸움이 되죠. 당신의 문장은 내가 도망쳐 숨을 공간이었습니다. 다시 못 볼 것처럼 사랑을, 다시 안 볼 것처럼 오늘을, 지금의 이름을 부르며 살겠습니다. 꽃 진 자리에 초록 돋아나듯 눈물 진 자리 여린 잎사귀처럼 살겠습니다.


당신의 시를 부적 삼았기에 절망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꽤나 많은 것을 잃었지만 나였던 것을 내어주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후련합니다. 내 것이 아니었던 이름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저 너머로 가 반짝입니다. 누구의 아픔을 저울에 달까요. 모두의 삶이 상실의 역사인데요. 잠시 머물다 가기 전에 온기 한 줌 내줄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어찌 말로 위로하려 들까요.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가지런히 모은 숨결 깔아놓을 뿐이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별의 조각이고, 조각나 있기에 반짝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머물 뿐이지만 내내 삶은 반짝이고 있었지요.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우리의 가슴 안에 살아 있다가 마침내 저 편으로 넘어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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