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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먹는 기획자 Jun 08. 2020

집 밥 같은 실비(實費) 문화

술집이나 7시면 손님을 받지 않는다.

 평소 즐겨보던 유트버 중 “섬마을 훈태”가 있는데, 경남지역의 가성비 좋은 술집을 소개하는 것이 주요 콘텐츠이다. 그중 2020년 꼭 먹어볼 리스트에 적어 놓은 것은 남해 쪽 특유의 식문화인 실비 문화였다. 이익이나 수당 등을 제외하고 실제로 드는 비용이라는 뜻의 실비는 어업에 종사하던 가장이 해난사고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가 집에서 해 먹던 음식을 그대로 내어와 간단히 술을 팔아 부양했던 문화에서 기인했다.


 그래서 메뉴판은 없고, 가격은 소주 한 병 만원(안주 포함) 정도로 술을 시키면 알아서 안주를 내어주는 시스템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전주의 막걸리 집, 서울의 선술집 등 지역마다 가지고 있던 문화지만, 관광 아이템이 되면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하지만 좀처럼 오기 힘든 사천은 그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게 되었다.(기차역은 없고 서울에서도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실비집 어디를 들어가나 다 잘 나온다는 현지인의 말을 믿고 조금 늦은 오후 7시쯤 실비집 문을 열었으나,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고, 영업이 끝난 가게도 있었다. 지역 주민에게 사랑받은 로컬 식당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다행히 5곳 정도를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받아주시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특히 찰밥이 너무 좋았다. 한 3번쯤 한상 가득 내어주셨는데, 사진은 한 번만 찍었다.)

 제일 처음 내어주신 반찬은 지역 특색이 느껴지는 밀치 조림과 수육, 회무침, 숭어회, 오징어회, 해산물 모둠이 먼저 나왔다. 특히 고수와 같이 특유의 알싸한 향이 느껴지는 방아잎과 시래기는 된장, 다진 마늘이 전부지만 조림의 밸런스를 잡아 주기 충분했다. 뼈째로 먹는 밀치는 비린맛이 없이 신선했다. 그리고 다음 안주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될 때쯤, 찰밥, 볼락구이, 꼼장어 볶음, 우럭 미역국이 나왔다. 역시 한식은 밥과 국, 구이, 조림이 나와야 비로소 한 끼가 완성이다. (나온 메뉴는 20가지 정도였으나, 술을 마신 탓에 모두 기억나진 않는다.)

사천 식문화의 특징은 작은 도시가 가진 매력이다. 10만이 조금 넘는 인구의 사천은 내가 사는 강남구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꼭 필요한 인프라만 가지고 있는 조용한 시골 동네이다. 그래서 20곳 남짓 있는 실비집이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담백하게 내어준다. 조미료를 강하게 써서 한번 먹고 말 관광지의 음식이 아니라, 담백하게 집에서 먹던 것 그대로 내어주신다. 서로 아는 사이이며, 모두가 해산물 전문가이기 때문에 싱싱한 해산물 본연의 맛에 충실하지 않으며, 인심을 잃기 쉽다. 평소 뷔페 음식은 영혼이 없어서 별로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화려하게 여러 개의 반찬이 내어지는 것보다 한 개 반찬이라도 정성이 담겨있는 것이 좋다. 그럼 의미에서 열악한 숙소를 제외한다면, 사천은 좋은 선택이었다.


-홍보는 없고 요리를 통해 깨달았던 내용이나 스토리 있는 음식과 문화를 설명하는 밥 먹는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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