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전 아홉시경 막내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참 교문 앞에서 학생들 아침맞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막내가 아직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부랴부랴 막내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우리 집으로 인터폰을 좀 해달고 부탁했다. 옛날처럼 전화기가 있으면 전화벨 소리에 일어날텐데 지금처럼 남녀노소 누구나 개인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때에는 무음으로 해놓으면 속수무책이다. 인터폰 소리에 막내는 일어나서 머리를 휘날리며 학교에 갔고 당연히 지각을 했다. 그리고는 엄청 속상해하면서 몇날 며칠을 투덜거렸다.
그 날 이후로 새벽같이 출근을 할 때마다 불안하다. 막내가 또 지각을 하는 건 아닌지! 오늘도 전화를 걸어 막내를 깨워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야! 전화를 해서 막내를 깨우는 건! 진정 막내를 위한다면 막내가 혼자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키워야지! 그래 내려놓자! 나의 이 불안한 마음을!'
엄마인 나의 마음이 편하자고 든다면 휴대폰 소리를 무음에서 소리나게끔 바꾸고 일어날 때까지 전화를 하면 된다. 그래서 아이가 전화를 받으면 내 마음은 잠시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정말 아이를 생각한다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내 마음 잠시 편하자고 아이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아이도 나도 점점 불행해질 따름이다. 아이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손을 떼는 것! 아이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것!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가를 마냥 내가 안고 다닐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아가가 걸음마를 배울 기회를 내가 빼앗는 꼴이 된다.
잠시의 아이에 대한 애잔함과 그로인한 내 마음의 불안감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는 내 도움없이도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가는 독립된 성인으로 자라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행동이 어떤 때는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