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협의회 총무를 벌써 3년 동안 하고 있다. 올해는 기어이 다른 사람에게 넘기리라! 다짐을 했다.
"올해는 다른 사람이 총무를 하면 안 될까요?"
"그럼, 새로 들어온 사람이 총무를 해야지!"
올해 새로 들어오신 분은 나보다 경력부터 시작해 연배까지 한참 위이신 선배님이시다. 이 분에게 총무 자리를 넘기는 것도 편치 않은 일인 듯했다.
"아니에요. 제가 그냥 할게요!"
다시 총무를 떠안게 되었다.
총무를 맡은 처음 1년과 2년은 신나서 일을 했다. 타고난 오지라퍼이면서 남에게 퍼주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진면모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환송회 때는 멋진 회식장소를 다방면으로 수소문해서 예약하고, 지구별 협의회를 떠나는 분들을 위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서 멋진 선물도 마련해드렸다. 그러나 3년 차가 되니 슬슬 부화가 치민다. 남의 돈을 내 통장에서 관리하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내 돈인 줄 알고 잘못 썼다가 메꿔 넣을 때는 괜한 생돈이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제는 회비 계산하는 것도 성가시다.
서비스 정신과 오지라퍼의 유통기한은 딱 2년인가 보다. 작년 회비 정산과 올해 회비 모집도 하기 싫어 미루다 미루다 오늘에서야 메시지를 날렸다.
"2020년 회비를 걷겠습니다. 제 계좌로 이체해주세요!"
'성장과 치유'라는 제목의 연수를 듣는 도중 나오는 글귀가 나를 멍하게 만든다.
남에게 좋은 사람이기 위해 나에게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살아왔나?
자아존중감이 없는 삶은 텅 빈 나(마음)를 만들고 타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삶을 살게 된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나를 숨기고,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만 고민하게 된다. 자아존중감이 높지 않으면 타인에 의한 외로운 삶을 살게 된다. -연수내용 중에서 발췌-
만약 그 당시에 새로운 신입단원이 총무를 맡는다는 불문율에 따르는 척하면서 자리를 넘겼다면 어땠을까? 회원들은 별 이의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미 내가 2년 동안 총무를 해왔기 때문에 나에게도 별로 나쁜 이미지를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기 위해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인 것이다. 내가 총무를 3년 연임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 눈치다. 만약 이렇게 총무 3년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다가 스트레스를 화로 터뜨리기라도 하는 순간에는 그동안의 수고가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때 당당하게 나의 의사를 밝히고 조금 냉정하게 총무 자리를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만 고민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비 오는 날 총무 3년 차의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 남에게 나쁜 사람이기보다는 단지 No 만 말할 수 있었으면 되었다. 내 마음도 모르고 장맛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