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은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게 집콕 생활을 영위하느냐에 달렸다.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며 심심해하는 것은 이제 그만. <데일리타임즈W> 기자들이 각자의 취향과 적성을 살려 집콕 취미 생활에 돌입했다. 홈 트레이닝으로 ‘확찐자’를 예방하는가 하면, 숨겨왔던 덕후력을 살려 만화책을 돌파하고, 추억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취미활동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도 마련했다. 미술관 대신 스마트폰에 나만의 아트 컬렉션을 만들고, 단골 술집의 안주를 집에서 재현한 홈바를 만드는가 하면, 잔부터 원두까지 오직 나만을 위해 셀렉션한 홈카페를 열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 결국 집에서 홈파티를 벌인 기자까지 지루함을 즐거움으로 바꾼 생생한 후기를 읽다 보면, 어서 귀가해 자신과의 설레는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질 것이다.
칼퇴는커녕 주말도 반납해야 하는 직장을 다니던 시절, 나에게 집은 그야말로 잠자는 것 외에는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최소한의 가전 가구만 갖춘 집은 인테리어와 거리가 멀었고, 생수만 덜렁 들어 있는 냉장고와 물건들이 범람하는 방으로부터 늘 도망치고 싶었다. 워라밸을 충족하는 매체로 이직한 후에도 쉬는 날이면 지인들과 만나거나 혼자 카페에 가는 등 집에 통 정이 붙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달력을 빼곡히 채우던 약속과 여가 계획이 모두 취소되고, 집에 갇히게 되자 나에게 코로나블루가 찾아온 건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엔 늘어지게 잠만 자고, 난생처음 넷플릭스를 구독해 미드로 날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집콕 ON, 즐거움에 접속’ 캠페인을 시작했고, 슬로건 문구 중 ‘집콕에서 찾은 나의 재능’에 마음이 꽂혔다. 언젠가 내가 쓴 글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포부를 품고 있던 터. 학창 시절 서양화를 전공한 언니를 따라 습작하던 추억을 다시 되살려 보고 싶었다.
그림 그리기의 첫 단계는 다름 아닌 청소였다. 수많은 책과 반려묘의 장난감이 나뒹구는 방에서는 도저히 그림 그릴 맛이 나지 않았다. 내친김에 자취하면 새집을 꾸미겠노라며 사뒀던 청소와 수납 관련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미뤄뒀던 화장실부터 온 집을 하수구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대청소했고 계절 상관없이 걸려있던 옷들과 물건들도 정리했다. 책상 위를 깨끗이 닦고 연필꽂이에 각종 필기도구도 세팅하고 나니, 멋지진 않아도 깔끔한 나만의 화실이 완성됐다.
이제 그림을 가르쳐줄 선생님을 모셔올 차례. 요즘엔 클래스101 같은 온라인 클래스가 인기고, 아이패드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아날로그 인간이자 뭐든 책으로 배우는 나는 이전부터 점 찍어 뒀던 <아방의 그림 수업 멤버 모집합니다>라는 책을 선택했다. 심플한 그림 스타일이 취향에 맞기도 했지만, 배경이나 디테일이 적어 ‘이 정도면 해보겠다’는 용기도 생겼다.
뭐든 '장비발'이 중요하니, 곧바로 미술용품 전문 온라인몰에서 준비물을 구매했다. 이미 집에 연필, 펜, 색연필이 있었지만 이런 쪽에 집착이 심한지라 굳이 저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스펙의 H심 연필, 0.5mm 펜, 유성 색연필, 전용 색연필 깎기 등을 구입했다. 특히 선명한 색감 표현이 가능하다는 유성 색연필은 이 책을 고른 이유이기도 해서 포기할 수 없었다.
책에서 소개하는 심플 드로잉은 모든 그림을 4스텝으로 해결한다. 우선 사진을 관찰해서 그리고 싶은 대상 3가지를 정하고, 연필로 덩어리를 스케치한 다음, 펜으로 디테일한 형태를 잡고, 색을 칠하면 완성. 사진을 보고 그리는 건 창의적이지 않다고 여기던 편견과 달리 사진을 ‘관찰하는’ 첫 번째 스텝은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사진에서 표현하고 싶은 3가지를 정하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채색할 때도 최소한의 색만 사용해 포인트를 주는 것이 심플 드로잉의 특징이다.
연습용으로 제시된 첫 번째 그림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과 펜이다. 처음엔 연필로 덩어리만 잡은 후 펜으로 바로 디테일을 그리는 방식이 어색했다. 펜으로 그렸다가 실패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과감히 선을 그려나갔다. 무사히 스케치를 마치고 드디어 채색 타임. 일반 색연필보다 색감이 진하고 부드러워서 꽉 차는 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유성 색연필을 시험해볼 기회였다. 잔에 담긴 커피를 칠하기 시작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팔이 빠질 정도로 힘을 주어도 책 속 그림처럼 매끈하게 표현이 되지 않았다. 더 넓은 면적인 테이블을 칠할 때는 들쑥날쑥한 힘과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책 속 그림은 사실 보정 작업을 한 게 아닐까? 고심 끝에 찾은 원인은 다름 아닌 종이였다. 내가 선택한 노트는 파스텔이나 목탄을 사용하도록 일부러 거친 질감을 넣어 매끈한 색 표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종이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신 아예 거친 질감을 살려 크레파스로 칠하듯 성긴 표현을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회사에서 일이 많아 피곤한 날도,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던 날도, 마음이 복잡한 날도 어김없이 퇴근 후 나의 작은 화실을 찾았다. 2단인 줄 알았던 색연필의 바닥에서 숨겨진 1단을 뒤늦게 발견해 유레카를 외치기도 하고, 미묘한 표정이나 손동작이 그려지지 않아 같은 그림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는가 하면, 내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나만의 창작 그림을 멋지게 표현한 날도 있었다. 노트에 그림이 하나씩 완성될수록 작은 성취감이 쌓였으며, 코로나19가 끝난다면 여행지에서 현장감을 살린 스케치를 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흰 종이 안의 그림은 전적으로 나의 구상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힘든 날도 그림을 그리며 위안 받았다. 최소한의 것만 선택하고 과감히 생략하는 것, 다 채우려 욕심부리지 않는 것, 수많은 색 중 한두 가지에 집중하는 것.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던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조용한 숲길을 걷는 것 같은 힐링을 선사했다. 알록달록한 색연필을 꽉 쥐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 보면 잡념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집 안에서 적막함 대신 온기를 느낀 건 독립 후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이었다. 애착이 생기자 청소도 자주 하고,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는가 하면, 조명처럼 작은 소품을 하나둘 사들여 집을 꾸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만의 작은 화실에서 확장해 아늑한 집으로 ‘콕’ 갇히게 된 지금, 나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바쁘고 활기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데일리타임즈W 김수영 기자 dtnew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