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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기 Feb 01. 2024

영어와 화해 먼저 하고

외국어 유목민의 자아성찰 3

그때 나는 어쩌다 휴학을 하게 되었고 말레이시아로 3개월 휴가 아닌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난 분명 휴가를 목적으로 떠났건만 어머니는 다른 생각이셨는지 어학원을 등록시켜 버리셨고(그 당시 난 영어도 못했다) 난 거부의사를 나타내지도 못한 채 매일같이 9시부터 3시까지 학원에서 영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일본, 터키 등 세계 각지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한 공간 안에서 어설프게 영어를 하는 모습이란 꽤나 귀엽고도 기특한 광경이었다.


난 영어를 싫어했다. 죽어라 영어를 공부했던 기억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문법과 단어에 그쳤다. 말하기는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쓰기 역시 그렇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도 있어야 한다고. 나에게 영어는 오직 인풋만 쏟아부은 격이었다. 아웃풋은 하나도 없는 나의 영어 실력. 그러니까 문법과 단어는 엄청나게 많이 암기해 놓고는 말하거나 쓰거나 한 적이 없는 것이다. 효율이 떨어지는 학습을 해온 것이다. 더불어, 틀리면 맞기까지 했으니 영어에 대한 적대감은 오죽하랴.


영어와 화해한 것은 여러 경험 때문이었다. 영어를 활용한 경험들이 쌓여서 난 영어와 화해할 수 있었고 우리 사이는 한차례 가까워졌다. 첫 번째로는 태국인 친구와 친해지는 과정에서였다. 우리는 한국에서처럼 간혹 단어 시험을 보았는데, 그 친구가 금방 외운 단어도 틀려버려서 내가 ‘네 머릿속엔 지우개가 있니?’ 하고 놀리고 싶었던 것이다. 무례하지만 성격 좋은 그 친구는 그 조킹을 받아주었고 우린 그 계기로 점심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영화 보러 놀러도 가고.


두 번째로는 일본인 친구와 친해지는 과정에서였다. 일본인 친구는 나와 집이 비슷한 곳에 위치하여 택시를 타고 귀가한 적이 많다. 그 친구가 나보다 영어를 잘해서 항상 택시를 잡아주었고 도착지를 말하거나 택시 기사님과 수다 떠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었는데, 점점 그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중엔 나도 유창하게 내가 사는 곳 주소를 말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특유의 발음으로 말이다.


세 번째로는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자유로움과 영어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사실 만국 공통어인 영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세계 어디든 혼자 누비고 다녀도 어느 정도 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걸 뜻한다. 말레이시아 3개월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귀갓길, 나는 공항에서 짐 찾는 곳이 어디냐 물었고 스튜어디스는 위치를 알려주셨다. 짧은 대화였지만 마치 모국어로 오고 가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난 자유롤 느꼈다. 긴장하지도 않았고 머릿속으로 준비하지도 않았고 친절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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